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 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아무런 직함을 갖지 않고도 `숨은 지도자’였던 장일순을 설명하는 말이나 일화는 수없이 많다.
장일순(1928~1994)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는 책이 나왔다. 생태운동가 최성현씨가 쓴 《좁쌀 한 알》(도솔)이 그것.
최씨가 장일순의 삶을 `지금 이곳’에 불러오기 위해 택한 방식은 그와 크고작은 인연을 맺은 이들을 두루 만나 그에 얽힌 말과 일화들을 촘촘히 건져올린 것. 그 조각들이 모여 전설이나 신화와도 같은 그의 생애에 구체성의 살을 부여한다.
책 제목이 된 `좁쌀 한 알’은 그의 호. 그 작은 이름을 택한 데서도 그의 생애의 뜻이 드러난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잖아. 그럴 때 내 마음을 지긋이 눌러주는 화두같은 거야”가 그의 설명이다.
그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불리던 강원도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반독재 투쟁을 이끈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 시절의 호는 무위당.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80년대에는 `한살림’으로 대표되는 생명환경운동을 이끌었다.
발문을 쓴 김지하는 장일순의 생애를 `모심’과 `살림’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 바탕에는 “밑으로 기어라!”는 실천이 있었다.
길을 한 번 나서면 아주머니, 아저씨, 좌판장수, 가게 주인, 리어카 채소장수, 식당주인, 농부들 할 것 없이 이야기를 나누느라 20분 걸릴 길도 두어시간 걸리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밥 한사발’에도 그런 모심의 자세는 일관됐다.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그는 해월의 가르침처럼 늘 `밥 한사발’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이밥알 하나라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힘을 합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법이야. 하찮게 보이는 밥알 하나가 우주를 백그라운드로 삼고 있는 셈이야. 청와대 빽 좋아하는데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늘 힘든 이들의 친구가 되고 해결사가 돼주었던 그는 `부드러움의 힘’을 믿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이 책에는 숱한 일화와 더불어 그의 글씨와 그림도 들어 있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라고 말했던 그의 정직한 글씨와 사람 얼굴을 떠올리는 특유의 난초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80년대 수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할 때마다 그는 한 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이 없었다. 그러고는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의 가르침중 또하나 절실한 것은 날마다 `부활’하라는 것. 삶에서 넘어지고 엎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란 말이다. “날마다 넘어져요. 그럴 때는 또 넘어졌구나 하고 알고 털고 일어납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런 건 남은 모르고 그저 저 혼자 알고 가는 거지요.” 큰 사람 장일순의 생애에도 그렇게 `혼자만 아는 숱한 넘어짐과 일어섬’이 있었으리라.
한편 10주기를 맞아 장일순을 기리는 또 한권의 책《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녹색평론사)도 나왔다. 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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