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6)대중의 시선을 이겨내는 어머니의 양심
G. G. 마르케스, '화요일의 시에스타'

[백청일의 독서일기] (6)대중의 시선을 이겨내는 어머니의 양심 G. G. 마르케스, '화요일의 시에스타'

오늘 다룰 작품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이하 마르케스)의 아주 짧은 단편 ‘화요일의 시에스타’입니다. 마르케스는 20세기 스페인어 소설 중 가장 걸출한 작품이라 평가받는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하지요.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출신으로 젊어서 해외 특파원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국 콜럼비아의 부패와 억압, 장기 집권화의 음모 등을 비판하는 칼럼 등을 썼다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지인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도움으로 작품을 쓰게 되었고, 그 작품들이 전 세계에 번역되어 남미의 사회와 문학에 대해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지요(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네이버캐스트).

‘화요일의 시에스타’는 마르케스가 196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집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Los funerales de la Mama Grande)’에 실려 있습니다. 이 소설집은 국내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화요일의 시에스타’는 인터넷에 번역본이 올라와 있으니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10여 년 전 작품을 접한 후 주인공인 여인에게 매료되었답니다.

도둑질을 하다 사살된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 하지 않았는지 나무라는 신부와 착한 아들이었다며 아들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어머니. 사살된 도둑의 어머니가 아들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러 왔다는 걸 알고 몰려드는 대중들과 자신을 조롱하는 대중들 사이로 아들의 묘지를 가기 위해 당당히 거리로 나가는 어머니. 오늘은 종교적 권위와 대중들의 조롱에 맞서는 여인의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작품 내용


해가 눈부신 8월의 어느 화요일, 여인과 소녀(어머니와 딸)가 삼등칸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둘은 수수하고 빈약한 상복을 입었고, 소녀는 신문지에 싼 꽃다발을 들고 있습니다. 기관차의 연기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머리에 검정이 앉기에 소녀가 창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닫히지 않습니다. 오전 11시경 기차는 끝없는 바나나 농장을 횡단하고 무더위가 시작되는 12시 경 시가가 없는 정거장에 급수를 위해 10분간 정차합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시가를 지나고 농장을 지나 오후 2시 경 어느 시가에 도착합니다. 그 시간 거리는 낮잠을 자기에 고요합니다. 상점, 관공서, 공립학교는 11시에 문을 닫고 4시 직전 다시 여는 시에스타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과 소녀는 낮잠을 훼방하지 않고 시내로 들어가 교구사택을 방문합니다. 돌아가는 기차가 3시 반에 떠나기 때문에 급한 일이라며 자고 있는 신부를 깨워 묘지(무연고자 묘지) 열쇠를 받으려고 합니다.

방명록을 펼쳐 서명을 받으려고 어떤 무덤을 찾아보려는지 이름을 묻는 신부에게 여인은 ‘칼로스 센티노’라는, 지난 주일 이곳서 사살된 도둑의 이름을 대며, 조용히 자제하며 자신은 그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울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경건한 놀라움을 느낍니다. 서명을 하는 여인에게 신부는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여인은 착한 아이였으며 누군가가 먹을 필요가 있는 물건을 훔치지 말라고 일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전 권투를 할 때는 두들겨 맞아 이를 모두 뽑아내야 했고, 사흘 씩이나 누워 있었다고, 당시 밥을 먹을 때는 아들이 얻어맞은 주먹냄새가 났다고 말합니다. 신부는 하느님의 의사는 불가해한 것이라고 별다른 신념 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칼로스 센티노의 무덤을 찾는 방법을 일러주고 거리로 나 있는 대문을 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떼의 꼬마들이 쇠창살에 코를 박고 이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눈치챕니다. 신부가 대문을 열자 아이들은 흩어졌지만 여느 때 같으면 한산할 거리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사택을 지켜보고 있는 걸 확인합니다. 거리를 꼼꼼히 살펴 본 신부는 마침내 이해를 하고 다시 대문을 닫고 여인에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신부의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여인은 꽃다발을 뺏아들고 대문 쪽으로 나갑니다. 온통 몸이 녹을 거라고, 양산을 빌려준다는 신부의 호의에 고맙다고, 이대로 괜찮다며 여인은 소녀의 손을 잡고 거리고 나갑니다.

작품 이해를 위한 배경지식


작품 감상을 위한 배경지식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작품의 갈등 구조를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맥락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작가의 섬세함과 치밀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시에스타(siesta)

시에스타는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지중해 연안 국가와 라틴아메리카의 낮잠 풍습을 말합니다. 한낮에는 무더위 때문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여 저녁까지 일을 하자는 취지입니다. 시에스타라는 말은 스페인어이며, 라틴어 ‘hora sexta(여섯 번째 시간)’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시에스타 시간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습니다(시에스타, 네이버 지식백과).

이 작품에서 시에스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입니다. 그것도 한 여름인 8월의 화요일입니다. 얼마나 더운지 물에 적신 꽃다발이 말라버렸기 때문에 “소녀는 흠뻑 젖은 신문지에 꽃을” 다시 쌉니다. 여인과 소녀가 도착한 “시가는 무더위 속에 둥둥 떠 있”습니다. 모든 곳이 문을 닫고 전신전화국만이 문을 열고 있습니다. 집들은 안쪽에서부터 잠그고 휘장을 내려놓고, 어떤 집은 너무 더워 앞마당에 나와서 점심을 먹고, 어떤 이들은 길거리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시가가 낮잠을 자고 있”는 거지요. 여인과 소녀는 시에스타가 한창 진행 중인, 또는 시에스타를 한참 만끽하고 있는 시가를 방해하지 않고 교구 사택으로 갑니다. 시에스타는 배경 역할을 하면서도 작품 결말 부분에서 중의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아시엔다(hasienda, 대농장)

작품 첫 문장은 “기차가 … 균형 잡힌 끝없는 바나나 농장을 횡단하기 시작하였다”입니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면 시가 뒤편으로 농장이 펼쳐져 있고, 다음 시가를 가도 농장이 맞닿아 있습니다. 도대체 농장이 얼마나 크고 넓으면 기차가 횡단하는 걸까요? 게다가 기차가 오전 11시경을 지나 오후 2시경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농장이 연이어 있습니다.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토지나 미개척지를 정복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매입하거나 약탈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토지를 획득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대규모의 농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 대규모 농장을 아시엔다라고 불렀습니다. 아시엔다에서는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커피나 사탕수수 등을 재배했고, 자급자족경제를 지향했는데 주로 원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노동에 의존하였습니다. 노예들과 원주민들은 농장주인 밑에서 짐승처럼 취급받았는데 농장주인들은 대부분 예수회 사제들이 운영하였습니다. 아시엔다는 식민지 시대의 수탈과 착취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아시엔다, 위키백과).

원주민들은 아시엔다 주변이나 산간지대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시엔다에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으면 살고 있던 곳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20세기 후반까지 진행되는 곳도 있었습니다(안데스의 착취와 수탈의 대농장, 아시엔다, EBS 동영상).

작품집이 1962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중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아시엔다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대지주와 농업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차의 창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기차 연기에 “머리에 검정이 잔뜩 앉”을 정도로 경제개발도 낙후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제는 단일재배를 위주로 한 농축산물 또는 광산물의 원료수출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배경 묘사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현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종교.

라틴아메리카에는 4억5000만 명의 인구가 살면서 인종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으니 그게 바로 가톨릭 신앙입니다. 대부분 국가에서 90%가 넘는 신자 비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1493년) 때부터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교회는 정복자들의 편에 서서 식민화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으며 근대에 들어서 많은 국가에서 군림하고 있는 독재정권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이런 흐름 속에서도 많은 성직자들이 원주민의 보호를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가 잘 이루어진 땅이라고 합니다.(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가톨릭,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의 권위에 맞서는 어머니


소설 속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렇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새벽 세 시 교구사택에서 몇 구역 떨어진 외로운 과부 레베카의 집에 도둑이 들어 앞문을 부숴 열려고 했습니다. 레베카는 구식 연발권총을 골방에서 찾아내 거실로 나간 후, “이십 년의 고독에 의해 그녀 속에 발전해온 공포감에 따라 사태를 판단”하고 자물통의 높이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다음 날 코가 엉망이 된 죽은 사나이는 맨발이었는데 시내에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신부는 “그의 이름이 칼로스 센티노였군.”이라는 독백으로 갈등의 시작을 알립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나 죽은 사내의 어머니라고 찾아온 여인이 아들의 이름을 말하자 그때서야 신부는 죽은 이의 이름을 알게 된 거니까요. 그리고 공책을 펴 여인에게 서명을 하게 하고는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을 안 하셨던가요?”라고 묻습니다. 물음 속에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아서 도둑질을 하다 죽지 않았느냐는 나무람이 묻어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 죽을 정도면 그 동안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이 도둑질을 하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찌 그걸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였느냐, 왜 보고만 있었느냐, 하는 야단도 담겨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라틴아메리카에는 주민 90%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때문에 신부와 교회의 영향력이 엄청 강하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신부가 여인에게 한 나무람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둑질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모세의 10계명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이에 맞서 여인은 “그는 아주 착한 아이였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때 여인과 소녀를 바라보던 신부는 일종의 경건한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들이 울려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계속해서 “나는 누군가가 먹을 필요가 있는 물건을 훔치지 말라고 일렀어요. 그리고 그는 내 말을 따랐어요.”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먹을 필요가 있는 물건”은 어떤 물건일까요? 바로 생존을 위한 먹거리겠지요. 여인은 아들에게 누군가에게 생존을 위한 먹거리라면 그걸 훔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여인 또한 아들이 음식을 도둑질하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걸 암시합니다. 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존에 직결되는 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들 또한 그 말을 잘 따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음식을 훔치지 않으면 아들과 자신의 가족이 굶주려서 죽기 때문이겠지요. 즉, 굶주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생존의 갈림길에서 최후의 선택지로 음식을 훔쳐서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여인의 말이 이보다 더 중요합니다. “한 편 그전 권투를 할 때에는 두들겨 맞아 기진맥진해 가지고는 사흘씩이나 누워 있곤 했습니다.”, “이를 모두 뽑아내야 했습니다.” 아들이 도둑질을 하기 이전 권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권투를 하다 두들겨 맞아 기진맥진해서 사흘씩이나 누워 있곤 했다고 합니다. 권투선수가 권투를 하다 두들겨 맞아 사흘씩이나 누워 있곤 했다? “누워 있곤 했다”는 것은 그런 일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권투선수가 권투를 하다 사흘씩이나 여러 번 누워있을까요? 이런 의문은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서 해결이 됩니다.

“당시 내가 밥을 먹을 때는 아들 녀석이 토요일 밤에 얻어맞은 주먹냄새가 났었어요.” 왜 어머니가 밥을 먹는데 아들이 얻어맞은 주먹냄새가 났었을까요? 아들은 아마 챔피언이 되기 위한 전문적인 권투선수가 아니라 스파링을 하면서 돈을 버는 권투선수였나 봅니다. 토요일 밤에 스파링이라는 명목으로 권투를 해서 푼돈을 벌었는데, 그걸로 가족을 먹여 살렸던 거지요. 일종의 ‘매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매값이 얼마나 처절한지 그럴 때마다 사흘씩이나 몸져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가 몽땅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만두었겠지요.

정리해 보면, 여인의 가족은 아들이 권투 스파링으로 매값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다 그것도 아들의 이가 몽땅 빠져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아들의 좀도둑질로 삶을 연명해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간략하게 소개했던 ‘아시엔다’를 참고하시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신부가 마침내 한마디 합니다. “하느님의 의사는 불가해한 것입니다.” 신부는 자신의 권위로, 종교의 권위로 하느님을 내 세우며 반박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어리석은 인간의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곧바로 뒤이은 서술에서 “그러나 그는 별다른 신념 없이 이 말을 하였다. 경험이 그로 하여금 회의적이 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더위 때문이기도 하였다”고 서술합니다. 왜 신부는 “별다른 신념”이 없었을까요? “경험”과 “무더위” 때문입니다. 무더위는 앞의 ‘시에스타’를 참고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경험은 어떤 경험일까요? 어쩌면 하느님의 뜻이 단기간 내에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평생 동안의 수도생활의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극심한 빈부격차, 넘쳐나는 굶주리는 사람들, 해결되지 않는 사회 혼란 등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신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교구 책임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할 신부로서의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신부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어려운 시련을 이겨내라고 설교를 하지만, 그럼에도 여인에게 면전에 대놓고 ‘도둑질은 나쁜 짓이다’고 뻔뻔하게 강변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신부와 여인의 갈등은 다음 장면에서 여인을 감싸려는 신부의 말과 행위에서 자연스레 해소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보다 더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딸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가는 어머니, 대중들의 조롱과 맞서다


안티고네, 프레더릭 레이턴, 1882

대화를 마치고 대문을 열어 여인과 소녀를 배웅하려는 신부는 꼬마 떼가 쇠창살에 코를 박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알아챕니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 보니 이미 시가의 그늘진 곳에 대중들이 모여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걸 확인합니다. 보통의 시간대에 시가지는 한산합니다. 그 시간은 시에스타가 진행되는 시간이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왜 왔을까요? 잠시 그들을 보면서 생각하던 신부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챕니다. 그리고 다시 대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 끝문으로 들어온 신부의 누이가 상황이 심각함을 일러줍니다. 사람들이 눈치챘다고, 앞마당으로 난 문으로 나가는 창가에도 사람들이 달라 붙어 안을 보고 있다고.

사람들이 무엇을 눈치챘다는 걸까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신부와 누이는 곤란해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신부도 경험한 것입니다. 도둑질하다 총 맞아 죽은 사내의 부모가, 가족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어떤 사람들이길래,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아들이 도둑질하다 총 맞아 죽게 하느냐고.

우리는 이미 앞에서 신부도 이런 마음속 경험을 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신부는 시에스타가 한창 진행 중인데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곳 사택을 둘러싸고, 거리 그늘진 곳에 무리지어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이해한 거지요. 그들도 좀 전의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여인에게 기다리라고 합니다.

여인은 잠깐 이런 상황을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순식간에 완벽한 이해에 도달합니다. 그리고는 “소녀에게서 꽃다발을 뺏아 들고 대문 쪽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소녀가 그녀를 뒤따릅니다. 그 뒤로 신부와 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세요.”, “온통 몸이 녹을 거예요.”, “기다려요. 양산을 빌려 드릴게요.”

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을까요? 모여 있는 대중을 피하라는 거지요. 정확하게는 그들이 보낼 멸시와 조롱, 야유와 비난 등을 굳이 감수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부가 생각할 때에도 여인과 소녀에게 보낼 대중의 멸시와 조롱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었던 거지요. 과거, 중세의 마녀사냥과 오늘날 ‘신상털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녀사냥과 신상털기는 인간을 만신창이로 만듭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후의 자존심과 품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서 목을 댕겅 잘라 버리는 미친 망나니의 칼부림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온통 몸이 녹을 거예요. 기다려요. 양산을 빌려드릴께요.”라는 대사는 이중적입니다. 시에스타가 진행되는 거리에 머리를 가리지 않고 나가면 쏟아지는 무더위에 일사병에 걸립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온통 몸이 녹을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산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다른 측면으로 보면 사람을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게 할 무더위만큼 대중의 멸시와 조롱 또한 사람을 쓰러지게 만든다는 거지요. 그래서 잠시라도 피할 수 있는 양산을 쓰고 얼굴이라도 가리라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대로 괜찮아요.” 여인이 남긴 말입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갑니다. 이 대목에서 죽은 아들이 착한 아이였다는 말을 하며 울려하지 않는 여인과 소녀를 보고 신부가 느낀 “경건한 놀라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숭고한 어머니의 신념과 의연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대중들의 멸시와 조롱, 비난과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은 아들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들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 왔다는, 어느 순간에도 결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리고 그러한 삶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는, 그래서 대중들의 멸시를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당당하게 걸어가려는, 결코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읽지 않겠다는 숭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히 “현대의 안티고네”(Alberto. J. Carlos)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에 익숙한 사람의 양심의 고요함


작가는 작품 앞부분에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녀는 가난에 익숙한 사람의 양심의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서술합니다.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가난에 익숙한 사람의 양심”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가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지니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심은 “고요”합니다. 화려하지 않고 솔직, 담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신념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정중동(靜中動)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딸은 대중들과 당당하게 맞섰던 거지요.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은 물론 이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더 널리 개인의 인격 형성에 관계되는 내심에 있어서의 가치적, 윤리적 판단도 포함”한다고 하였습니다(조국,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양심의 자유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받지만, 헌법을 초과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권리가 실정법이라는 틀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리들을 담고 있는 법을 보통 불문법이라고 하기도 하고, 실정법을 뛰어넘기에 상위법이라고도 합니다. 발리바르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위법들의 기원에 관한 표상은 변화해 왔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항상 동일하다. 그것은 생명체 및 죽은 이들에 대한 존중, 환대, 인간 존재의 신성함, 진리의 불가침성이다. … 이런 불문법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모든 입법을 넘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좀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실정법을 넘어서는 것이다.”(발리바르, 시민불복종에 대하여).

가난에 익숙한 사람의 양심을 지닌 여인/어머니는 오늘도 대중들의 멸시와 조롱을 온몸으로 버팅기며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도 많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 내고 있기 때문에 이 땅의 권리는 그만큼 치열하게 보장되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 내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지지와 연대가 그래서 필요한 거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부끄럽지만 그들처럼 우리 또한 우리네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겠지요.

백청일

참고문헌


발리바르, 에티엔, 시민 불복종에 대하여, ‘정치제에 대한 권리’, 후마니타스, 2011.

송하춘,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 현대문학, 1993.

조국,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책세상, 2001.

바벨의 도서관, http://blog.daum.net/sisycaros/10667585(검색일: 2020.11.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930&cid=58814&categoryId=58829(검색일: 2020.11.7.).

교구, 나무위키,

안데스의 착취와 수탈의 대농장, 아시엔다, EBS 동영상(2014.12.31.),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2517&cid=51670&categoryId=51672(검색일: 2020.11. 8).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가톨릭,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08645&cid=62119&categoryId=62119(검색일: 2020.11.8.)

시에스타, 네이버 백과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34426&cid=40942&categoryId=32175(검색일: 20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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