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남구 백운동

 200~300년 전엔 불과 수십, 수백명이 사는 한적한 곳이었다는 백운동. 지금은 광주에서 차가 가장 북적거리는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0~300년 전엔 불과 수십, 수백명이 사는 한적한 곳이었다는 백운동. 지금은 광주에서 차가 가장 북적거리는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남구 백운동은 광주에서도 차가 가장 북적거리는 곳 가운데 하나일 터다.
지금은 좀 나아진 편이라고 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광주의 교통정체를 상징하는 곳으로 백운광장 일대를 꼽는 이들이 많았다.
헌데 이 소란스런 동네도 200~300년 전엔 불과 수십, 수백 명이 사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마저 월산동 수박등에서 양림동에 이르는 야산에 걸쳐 군데군데 나뉘어 살아 그 한적함은 더했다.
백운동이란 말도 본디 사람들의 입에 닳고닳은 그런 이름이 아니었다. 이 이름은 1910년대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전에는 난지실과 진다리 등 여러 뜸으로 나뉘어 까치고개를 등받이 삼아 남쪽을 마주보며 사는 여느 농촌과 진배없었다.
당시 난지실은 백운초등학교 일대에 있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백운동 하면 진다리를 생각하지만 원래 백운동의 본바탕은 이곳 난지실이었다고 한다. 진다리는 까치고개에서 백운광장으로 넘어오는 길(독립로)을 기준으로 난지실 건너편을 가리켰다. 독특한 그 이름만큼 진다리란 지명엔 예전 이곳의 삶이 배어있다.

백운광장, 광복천과 개천 합류 물목

백운광장은 주월동에서 내려온 광복천과 봉선동에서 내려온 개천이 합류하는 물목이었다. 여기서 어우러진 물은 무등시장 쪽으로 빠져나가 극락천을 이뤘다. 이처럼 두 개천이 만나는 곳이지만 지대마저 워낙 낮아 걸핏하면 주변 일대를 질퍽한 땅으로 바꿔놓기 일쑤였다. 그래서 질퍽한 들을 이르는 전라도 방언, `진들’이 진다리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사람들의 뇌리에 이곳이 광주의 남쪽 관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1930년대 말부터였다. 남광주역을 나선 열차는 이곳 백운광장을 가로질러 남평과 여수 방면으로 빠져나갔다. 그 무렵 지금의 대주아파트 앞 언저리에는 작은 정거장이 생겨났는데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정거장을 일러 벽도역(碧桃驛)이라 불렀다.
하지만 벽도역은 거의 이름뿐인 역에 가까웠다. 비바람을 가려줄 변변한 역사(驛舍)도 없었고 그저 껑충한 나무 몇 그루가 햇볕을 가려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완행열차가 다니던 시절, 백운동 사람들은 그 열차에 몸을 싣고 1일과 6일에 열리는 남평장에 나가 채소나 생필품을 사다 쓰곤 했다고 한다.
철도가 놓이던 무렵에 또다른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동네에 붓 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백운동 토박이보다는 외지인이었던 걸 보면 철도가 이들의 백운동 정착을 도왔던 것 같다. 이렇게 첫 세대가 뿌린 씨앗은 2∼3대에 걸쳐 전승되어 오면서 오늘날 백운동 붓(일명 진다리 붓)의 명성을 일궈왔다. 철도를 생각하면 이처럼 백운동이 붓의 명산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광주의 근교였다는 점도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던 탓에 백운동은 땅값이고 집값이 쌌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에게 값싸고 양지바른 백운동은 좋은 보금자리가 돼주었던 것이다.

철도 놓인 후 동네에 붓 매는 이들 정착

집값이 쌌던 탓에 백운동의 풍경에도 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붓 매는 장인들이 들어올 무렵부터 백운동엔 벽돌공장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벽돌공장은 일의 특성상 넓은 부지가 필요했고, 백운동은 그런 구미에 딱 들어맞는 동네였다. 금상첨화 격으로 이곳엔 오랜 세월 화강암이 풍화되어 이룬 황토밭이 많아 벽돌 구울 흙을 구하기에도 수월했다.
벽돌공장 덕분에 많은 일꾼들도 들어와 살았다. 일찍이 1940년대 중반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이곳 벽돌공장에 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중엔 김성삼(金成三)이란 40대 중반의 독신남자도 끼어 있었다. 그 역시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백운동에 들어왔을 터인데, 특별히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듬해 8월, 해방이 됐을 때 누구나 그의 또다른 이름을 듣게 됐는데, 그가 바로 좋든 싫든 우리 현대사의 한 주역이 된 박헌영(朴憲永)이었다.
한때는 질펀한 오지 땅에서 삶의 희망을 건져 올리던 농촌, 말 그대로 흰 구름이나 쉬어 가던 조용한 마을이던 백운동, 그러면서도 뭇사람들에겐 철도와 광장, 상습교통정체로 기억되는 이 동네도 우리가 평소 모르던 많은 다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아마 백운동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박제된 동네 역시 많은 얘깃거리를 간직한 곳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05년 5월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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