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27) 실벤느 자우이, 내가 안 보이나요, 한울림스페셜

 세상에는 힘든 일이 참 많습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수 년(또는 수십 년) 우정이 깨지기도 하고,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그만 살까, 충동적인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전 재산을 밀어 넣어 벌인 사업이 코로나19와 여러 사정으로 쪽박을 차거나 빚더미에 오르기도 합니다. 효자효부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 못할 고민을 형제자매들에게조차 털어 놓을 수가 없어 홧병을 앓고 있기도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힘듦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도 있고, 그럼에도 항상 밝게 웃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살기도 합니다. 주문처럼 반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시간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거나, 심지어 그 시간들이 아주 오래도록 진행되기도 하지, 하며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보는 거지요.

  “사연 없는 사람 없다”는 말은 인간은 저마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안고, 이고, 지고 사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어찌 보면 ‘인간의 숙명’을 잘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숙명’이나 ‘운명’은, 참, 무거운 말입니다. 남들도 그렇지, 하며 자신을 ‘객관화’해 보는 것으로도 힘듦이 풀리지 않을 때 이것이 내 운명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좀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자신을 돌아보며 ‘초객관화’를 시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내 힘듦을, 누구에게 말한다 해도 풀리지 않을 걸 알기에 ‘내 운명’이겠거니 하며 참고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수고스러움을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해서 그냥 아무에게라도 털어 놓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어른’이라며, ‘인간’이라며, ‘내 길’이라며, 힘듦을 짊어져야 할 숙명이라고 안고 가는 경우, 대부분은 ‘속병’이나 ‘홧병’,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 본인의 힘든 사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 시키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그 때문에 인간관계가 어그러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힘들고, 힘들어서 주변에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다 그런 거시여, 하거나, 사람들(어른들, 아이들, 학생들 등)은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세상 이치에 도통한 거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요즘 말로 ‘꼰대’ 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왜 그럴까요? 자신의 문제는 눈에 불을 켜면서도 다른 사람의 일은, 달관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니까요.

  멀 그런 거 같고 그러냐, 하거나, 이겨내, 그럴 때 일수록 이겨내야지, 남들도 다 그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은 세상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지만 남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니 세상 쉬워 보이고, 왜 그렇게 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진심으로 들어주고,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손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을 이 생에서 누리고 있는 거겠지요.
  오늘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그리고 직면한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발상의 전환, 거기에 진한 감동까지 줄 수 있는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실벤느 자우이의 『내가 안 보이나요?』.

  어린이청소년 도서이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가슴 가득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노와 열정, 용기와 포용 등을 깊이 생각하게 도와주면서 오래도록 여운을 주는 책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화두’와 같은 질문이나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직접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소개할까 합니다.

  참고로, 필자는 책을 다 읽은 후 간단한 소감을 꼭, 책 속지에 메모로 남겨 놓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메모가 되어 있네요. “커피 한 잔 마신 후, 현관 앞 무중력 의자에 앉아 단숨에 읽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다. 가장 감동스런 책.”

엄마와 다투는 엠마.
엄마와 다투는 엠마.

 비껴 서서 어긋나게 대화하기

  엠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12살 5학년 학생입니다.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기 위해 맹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엠마에게는 여섯 살 동생 아멜리아가 있습니다. 엄마는 의사 선생님 말 한 마디에 시골의 작은 집에서 대도시인 파리의 좁은 아파트로 이사올 정도로 동생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습니다. 아멜리아가 자폐증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멜리아는 놀지도 않고 말도 못 한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저 소리만 질러 댄다. …. 솔직하게 말하면, 아멜리아의 비명은 분노 발작에 가깝다. 아멜리아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 대면서 바닥에 드러누워 옷을 벗는다. 못 하게 막으면 상대가 누구든 마구 물어뜯는다. 마치 상처 입은 어린 짐승 같다.

  엠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세계를 돌며 콘서트를 연주하고 돈을 많이 벌어 자폐증 연구 협회에 기부할 생각을 할 정도로 동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친구가 집에 찾아오면, 동생의 발작을 알게 되고, 소문이 날까 두려워 전학 온 학교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에게조차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엠마의 피아노 콩쿠르를 앞두고 엄마는 동생 아멜리아를 공연장에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엠마는 연주 도중 아멜리아가 발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고, 엄마는 데리고 나갈 거라면서 싸우게 됩니다. 엄마와 엠마의 말다투는 장면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본 듯도 하고, 실제 눈앞에서 보는 거 같기도 합니다. 엠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엠마의 상황에 더 공감이 되기도 합니다.

  “얘기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지 마. 내 말은 콩쿠르에서 편한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잖아.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네 동생을 세상에서 밀어내면 네가 동생을 지켜야 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네 동생, 네 동생, 네 동생! 엄마 눈에는 아멜리아밖에 안 보여? 엄마 머릿속에 내가 있기는 해? 내 생각을 하기는 하냐고!”
 

  “대체 너한테 부족한 게 뭔데? 뭐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너는 설 수도 있고, 말도 할 수 있고, 볼 수도 있고 ….”

  목구멍에 동그란 공 하나가 걸린 듯했다. 그 공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혀 곧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쉬어 보려고 했지만 어디에도 공기가 없었다.

가출하려 짐을 챙기는 엠마.
가출하려 짐을 챙기는 엠마.

  가출하는 엠마

  여러 시도를 해 보아도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 생각한 엠마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되고 있던 엠마의 다리에 무언가 부딪히는 게 있습니다. 아멜리아. 늘 있던 일이었는데 처음으로 엠마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잡고 소리를 질러 댑니다. 자폐증 걸린 아이들이 그런 거처럼 아멜리아 또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고 맹수처럼 발버둥을 치다 급기야 엠마의 오른손을 꽉, 물어 버립니다. 비명을 지르는 엠마를 두고 엄마는 아멜리아를 방에서 데리고 나갑니다.

  그 날 저녁 엄마는 늦게 들어온 아빠에게 엠마가 갈수록 아멜리아에 대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오늘은 아멜리아를 때리면서 끔찍하다고 소리까지 질렀다고. 아멜리아를 꼭 공연장에 데리고 가야 하느냐는 아빠의 반론에 엄마는 이를 무시합니다.

  문틈으로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엠마는 “또다시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아무런 힘도 없는, 천사같은 동생’을 때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언니’가 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엄마의 비겁한 거짓말에 아빠까지 그렇게 믿을 건데, 그렇다면 아멜리아 없는 곳에 있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란 처음부터 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자리가 없는 이 곳, 집을 나가게 되지요.

  분노에서 열정 끄집어내기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출한 엠마는 친구 알리시아가 마음이 정말 괴로울 때 노트르담 성당 뒤편의 정원에 가서 그곳에 있는 이무깃돌에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말을 기억해 내고 성당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성당에 도착해 정원을 둘러보고 벤치 의자에 앉아 있어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모아 벤치를 발로 걷어찹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한 마디 합니다. “기분 좋게 화내는 방법”도 있다고. 엠마는 자신의 분노에 몰입해 있느라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할머니는 엠마와 같은 아이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루실 이야기’를 해 줍니다.

“루실은 아주 화를 잘 내는 어린 소녀였어.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던 날 자기 혼자만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몹시 미워했지”로 시작하는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할머니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엠마는 어느 순간 루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합니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 루실은 가슴 속 화를 어떻게 풀어냈을까요? 할머니는 우리가 아는 화, 분노를 이용해서 열정을 찾아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가슴 속에 있는 것을 하나씩 끄집어내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 마침내 “네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분노”에 주목하게 합니다.

  “네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짜 분노는 네가 가는 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날려 보내는 파도란다. 분노가 멀리까지 터져 나오게 해. 절대로 분노를 삼키려고 하지 마. 네 안의 분노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네 안에만 있으면 너를 절망에 빠지게 할 뿐이니까. 분노를 두려워하지도 마. 분노는 너의 힘이니까. 자, 무슨 얘기든 괜찮아.”

  “네 분노에서 찾은 열정을 간직하렴. 분노의 열정을 네 손 안에 받아서 불을 지키듯 지켜. 살아 있는 열정을 바라봐. 바로 그게 너의 보물이니까. 살아 있는 열정을 네 안에서 끄집어낼 줄 알게 됐으니까, 이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돼.”

진심이 가득 담긴 사과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엠마를 발견한 알리시아는 아침부터 ‘엠마 찾기 대작전’이 시작됐다고 말해 줍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동원되어 마을과 주변, 학교까지 찾아왔다고. 다행히 학교에 오신 할아버지가 운 좋게 자신을 만났다고.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해준 성당 이무깃돌 이야기가 생각나서 할아버지와 이곳으로 왔다고.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건네주었다는 엄마의 편지를 전해 줍니다. 엄마의 향기가 가득하고 사과와 사랑이 진하게 배인 편지에 엠마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립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공연장에 도착하자 아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공연 시작 전까지 잠깐 시간이 있는 걸 확인했다면서, 엠마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편지에 이어 아빠의 사랑이 가득한 사과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니다. 우리가 많이 잘못했어. 네 엄마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아멜리아를 혼자서만 돌보고 싶어 했어. 그리고 나는 엄마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뒀지.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도망쳤던 거야. 그 편이 훨씬 쉬웠으니까. 너는 그런 상황에서 힘겹게 자라 온 거지. 이제 달라질 거야. 아멜리아는 자기랑 비슷한 다른 아이들이랑 매일 공부하러 다니게 될 거야. 네 엄마는 피아노 레슨을 다시 시작할 거고, 나는 저녁마다 일찍 들어와서 네 숙제를 도와줄 거야.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은 건지, 그래서 좋아질지는 솔직히 아빠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노력해 보기로 했단다. 자, 이제 준비하러 가야지.”

연주 후 관객에게 인사하는 엠마.
연주 후 관객에게 인사하는 엠마.

 아빠의 사과에 대해 무슨 덧붙일 말이 있을까요? 여기서는 다만 우리가 평소 하는 사과와 함께 아빠의 사과를 간략하게 비교 정도만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두 마디만 잘 하면 인간관계에 크게 무리가 없다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늘, 실천을 하면서 살기도 하지요. 그 중 한 마디가 “미안합니다”입니다.

그런데 아빠의 사과는 좀, 생각해 볼 게 많습니다. ‘어른’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하는 사과인데다, ‘아빠의 위치’에 있기도 합니다. 대상이 ‘딸’입니다. 무엇보다 사과 내용이 자신의 ‘양육 방식’에 대한 겁니다. 사과 방식 또한 ‘직접, 얼굴을 보고’, ‘진심을 담아’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사과입니다.

  이걸 사회 차원으로 확장해서 이해해 보아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려와 봉사를 어느 순간 당연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인식하면서 베푼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요구하는 걸 정당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짜뉴스’에 피해를 본 피해자와 집단에 오히려 ‘대의’를 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거나, 권리를 바로 잡으려 소송하는 걸 ‘역공격’이라며 똘똘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작금의 사회 분위기로는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사과입니다.

  산다는 건

  엠마는 연주를 어떻게 했을까요? 엄마는 아멜리아를 공연장에 데리고 갔을까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리며, 여기에서는 엠마의 작지만 큰 깨달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공연 후 마지막 장면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콩쿠르가 끝났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하의 말과 이런저런 충고를 하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아멜리아에 대한 거슬리는 말도 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나는 이제 안다. 산다는 건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행복이 위협 받는 상황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열두 살인 나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길이 멀다. 하지만 멀리 가는 만큼 내 인생은 아름다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겠지요.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삶의 깨달음과 삶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살아간다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몇 갈래 길들로 나뉜다고. 세상일에 도통한 사람도 있고, 세상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세상일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사람도 있겠지요.

  열두 살 엠마가 겪은 경험은 어찌 보면 우리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또는 판에 박은 거처럼 똑같은 하나의 클리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 엠마가 소설 속 유일한 존재인 거처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의 엠마 또한 유일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소설 속 세계에서든, 현실 세계에서든 엠마가 경험하면서 느낀 깨달음은 울림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이치를 애써 부정한 채, 나와 우리의 행복만을 생각하려고 하는 세태에 필자 또한 포함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되뇌이게 됩니다.

  “산다는 건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행복이 위협 받는 상황까지도.”

  『데미안』(을 비롯한 세계문학들)을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철학서와 처세에 관한 책들이 아니어도, 이 한 구절이 주는 울림은, 몇 년이 지나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필자의 가슴 속에 큰 울림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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