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때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 참전으로 서울을 또 내주고 후퇴하던 국군과 UN군. 당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한반도 철수까지 검토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망명정부’ 장소로 제주도를 비롯 일본 야마구치현과 오키나와 그리고 태평양의 사이판, 티니안 등을 생각했다. 정부와 군병력, 민간인 등 최소 2만 명을 이동시키는 계획이었다. 망명정부의 요청은 한반도 상륙작전에 명분을 주게 될 터였다.
망명정부 명단엔 UN군 통역관으로 복무 중이던 문익환과 이영희도 들어 있었다. 미국에 의해 대한민국 핵심 요원으로 선발됐던 문 목사와 이 교수가 20여 년 후 소위 유신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몰린다.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바로 그 시점인 1951년 2월 13일. 한국전쟁 물줄기를 바꾼 전투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시작됐다. 당시 중국군은 수원~이천~원주~강릉 선까지 내려와 있었다.
지평리의 미군과 프랑스군은 열 배나 많은 중국군에 맞서 3박 4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중국군의 보급선이 길어진 탓도 있었다.
대대급 파병이 결정되자 스스로 중령 계급장을 달고 온 별 셋의 프랑스 몽클레르 장군. 2차대전 당시 18번의 부상과 18개의 훈장을 받은 이 백전노장은 지휘봉 대신 지팡이를 짚고 분투, 한국인 카츄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평리 전투는 용문산과 파로호 전투 등으로 이어지며 전선을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밀어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맥아더의 대한민국 망명정부 구상도 없던 일이 됐음은 물론이다. 당시 몽클레르의 지평리 지휘 본부는 목조로 된 양조장 2층 건물이었고, 그곳은 현재 시판 중인 모 막걸리병 라벨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1953년 한국전을 끝낸 프랑스군은 귀향하지 않았다. 대신 얼마 전까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으로 가 독립운동 세력과 싸웠다. 당시 프랑스는 제국주의 국가였다. 이들을 따라간 한국인도 몇 명 있었고 전병일이라는 분은 나중에 알제리 독립전쟁에도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은 18세기 중엽 시작돼 1884년 베트남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에 맞선 베트남 독립운동도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다.
1927년 베트남국민당,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됐으며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이 침략해 오자 독립운동가 호찌민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된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은 그해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다음해 11월 하이퐁에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1954년 5월 프랑스군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때까지 8년간 이어진다. 한국전 휴전 후 이동해 온 프랑스군도 이 전투에 투입됐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돼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된다.
제네바협정에선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토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선거를 거부했다.
그리고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된 농지를 다시 회수하면서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렀다. 각지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여기에 북베트남의 지원이 이뤄지며 1950년대 중반엔 게릴라 조직들이 무기를 갖춘다.
지엠 정권이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처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964년엔 응우옌칸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됐다.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을 늘려갔다. 도미노 이론(한 국가의 붕괴가 이웃 국가까지 영향을 줌)을 따른 미국이 쫓겨간 프랑스 대신 군사력을 투사한 것이다.
미국은 1964년 8월 7일 자신들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했다. 북베트남과의 전면전,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이다.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 회고록에서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고백했다. 미국이 도발한 2차 베트남전은 처음부터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미국은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00만 톤의 폭탄을 퍼부었고 55만여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래도 승기를 잡지 못하자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낸다.
세계 최강 미국은 동남아의 가난한 농업국, 베트남에서 왜 고전을 면치 못했을까. 다음 글의 주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