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희귀 자료가 발견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베트남 독립운동가 호찌민을 지원한 내용이었다. 자료는 베트남 식민 종주국 프랑스 경찰이 호찌민의 파리 활동을 밀착 감시한 사찰 보고서에 들어있었다.

 이 문건에는 ‘대한민국 임정 파리위원부가 호찌민에게 통신국 사용을 지원했고, 중국 신문과 잡지에 그의 글이 실리도록 주선했다’고 적혀 있다.

 보고서는 또 ‘극동의 평화’를 주제로 강연한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호찌민을 대동한 정황도 담고 있다.

 황기환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이병헌 역)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다. 재미교포인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 입대,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침 파리에 도착한 신한청년단 대표단에 합류했다.

 흥미로운 건 호찌민이 김규식·조소앙·황기환 등 파리에서 활동하던 임정 요인들을 독립투쟁의 ‘롤 모델’로 여긴 점이다. 사찰 보고서에 적힌 ‘그는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아 이들의 활동 방식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는 대목이 이를 뒷받침한다.

 호찌민은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인 김규식과 긴밀히 교류했다. 그는 아홉 살이나 많은 김규식을 독립운동의 대선배로 모시고 그의 노선과 이념, 경험 등을 열심히 배우려 했던 것이다.

 호찌민은 김규식과의 교류를 통해 기존의 순진했던 외교 노선 대신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호찌민은 프랑스 일간지에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란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 베트남의 프랑스어 학교에 다니던 호찌민은 반프랑스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퇴학당했고, 1911년 21세 때 프랑스 증기선의 주방보조로 취직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 후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와 유럽 각국을 돌아보고 미국과 영국에서 최하층 생활도 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는데, 이는 그의 정신적 기틀이 됐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호찌민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 ‘베트남 인민의 8개 항 요구’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등 각국 대표단에 제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정 대표단이 그랬듯 회담장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쫓겨났다. 전승국 프랑스와 일본이 이들 불청객의 발언권을 인정해 줄 이유는 없었다. 역시 식민지가 있던 미국 영국 등도 그들을 편들어 줄 리 만무했다.

 조선의 3·1운동을 촉발시킨 윌슨 미 대통령의 소위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이 패전국(독일 오스만제국 등)의 식민지 민족들을 부추켜 자국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호찌민은 레닌의 ‘반제국주의 노선’에 호응, 1923년 모스크바로 간다.

 레닌이 만든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도·지원하고 실력 있는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했다. 이곳에선 한국,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열혈 청년들에게 민족해방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다.

 중국의 덩샤오핑과 류사오치, 한국의 조봉암과 박헌영, 베트남의 호찌민, 일본의 가타야마 센 등이 모두 동문이다. 코민테른은 1922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극동민족대회를 열었다. 대회 참석자는 한국인이 제일 많았으며 김규식과 여운형도 의장단에 선출됐다.

 # 호찌민은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다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당했다. 영국 정부와 장제스의 국민당에 체포돼 감금되기도 했으나 1941년 30년간의 망명 생활을 접고 베트남으로 돌아온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 대신 일본이 점령 중이라 그는 일본을 향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항일 빨치산을 지휘하던 그는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 측에 연락, 합동작전을 제의했다.

 미군은 폐고무로 만든 신발에 사냥총을 들고 있던 호찌민 일행을 무시했다. 그러나 미국 OSS(CIA 전신)는 말라리아로 쓰러진 그를 위해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하는 등 호찌민(OSS요원 제 19호)과 미국의 끈은 이어졌다.

 이 일화에서 보듯 호찌민은 조국 해방 방법론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을 뿐,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다. 일본 항복 후 이미 지도자 반열에 올라있던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이로써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탄생했고 베트남 전역을 압도한 호찌민의 대중적 영향력은 미국과의 전쟁 시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고전한 이유다.

 일본 패전으로 베트남 독립이 당연히 주어지진 않았다. 베트남 남부를 기반으로 다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프랑스와 8년간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때문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이 베트남으로 이동한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섰던 호찌민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다음 주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