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다시 북위 17도선 남북으로 분단된다.

 10년 후인 1964년 8월 4일. 존슨 미 대통령은 “7함대 구축함 매독스호가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에 공식 참전한다.

 1972년 미국 언론은 국방성 비밀문서를 인용, ‘통킹만 사건은 베트남전에 뛰어들고 싶었던 미국이 북베트남 영토를 먼저 공격함에 따라 유발된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전쟁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찌민시)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북베트남 탱크가 진입하면서 10년 만에 종결됐다. 그동안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에선 200여만 명의 민간인이 전투 와중에 사망했다.

 이로써 베트남전은 초강대국 미국이 완패한 유일한 전쟁으로 기록됐다.(2021년 아프가니스탄 종전은 미국의 중동정책 변화에 따른 전략상 철수)

 호찌민은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69년 79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삶을 마감할 때 그는 승리자였다.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10만여 베트남 인민들이 운집, 통곡과 연호를 쏟아냈다.

 그는 민족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큰아버지이자 통일의 상징이며 실질적 지도자였다. 그리고 죽어서도 베트남 인민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으로 남았다.

 # 호찌민은 심지어 ‘적’에게서도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타임’지 1969년 9월 12일 자는 그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그리곤 미국이 타도해야 할 적으로 몰았던 호찌민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

 “호찌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의 1900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호’(호 아저씨)인 그를 이해했다. 남베트남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욕 타임즈도 전 세계의 애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사를 게재했다. “그의 가장 심하게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체구가 작고 허약한 호 아저씨에 대한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호찌민의 전기 작가 찰스 펜은 이렇게 썼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찬사는 전 세계적이었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적들조차 그가 사망했을 때 보여준 조의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 역시 전쟁 중이었음에도 그를 애도하기 위해 완전 철시했다. (이 때문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마저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중북부 응에안성에서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반프랑스 저항운동의 거점이었다. 아명은 응우옌 신꿍(공손한 아이)이고 11세 때 응우옌 땃탄(틀림없이 성공할 사람)으로 개명했다.

 깨우치는 사람이란 의미의 호찌민(胡志明)은 1941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오면서 붙인 이름이다. 프랑스 등에서 독립운동을 할 땐 응우옌 아이꾸옥(愛國)이란 이름을 쓰는 등 수많은 가명을 사용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의 편린들이다.

 호찌민도 허물과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가 베트남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오롯이 바쳤다는 것이다. 인민이 잘 살 수만 있다면 사회주의를 수정해서라도 자유경쟁의 원리와 시장경제, 사유재산 인정, 자유무역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식구들 때문에 인민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호찌민이 죽고 나서 유물로 남은 것은 책 몇 권과 폐타이어로 직접 만든 신발, 고물 라디오, 낡은 옷 3벌 등이었다.

 마오쩌둥을 보좌했던 중국의 저우언라이가 자식도, 무덤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황하의 재로 뿌려진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수도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영묘에 들어서면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그의 글귀를 마주하게 된다. 시신을 화장해 재를 3개의 상자에 담아 북·중·남부지방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베트남 정부는 그 지시만은 따르지 않았다.

 묘소 인근 생전 거처는 열 평이 채 안 되는 허름한 목조가옥으로, 프랑스 총독 관저의 전기 기술자가 살던 곳이다. 그의 청빈하고 소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역정은 프랑스 지배를 종식시키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호찌민과 그 도저한 영향력을 알지 않고선 베트남 전쟁의 전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렇듯 처음부터 승리가 거의 불가능했던 전쟁에 우리는 어떻게 참전하게 됐을까. 다음 글에서 다룬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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