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부터 있었다.

 휴전선에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반년 후인 1954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다. 한국전쟁의 UN군 도움에 대한 보답 외에도 한국의 위상을 알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 제안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만약 한국군이 외국에 나가 작전을 벌인다면 주한미군 병사의 어머니들에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할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논리 때문이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민의 완승으로 끝나자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신중히 고려했다.

 그런데 이번엔 전쟁 당사국인 프랑스에서 이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이미 인도차이나 전면 철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네바회담에서 베트남 분단이 결정된 후에도 이승만은 계속 한국군 파병 의지를 미국에 보냈으나 미국은 군사, 정치적 불이익이 더 크다는 판단으로 다시 선회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휴전협정 과정에서 사사건건 이승만과 반목했던 아이젠하워였다. 이승만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한국전쟁 재개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의 파병 제안이 장기적으로 한반도 북진통일 구상과 맞물려 있다고 보아 부담을 느낀 것이다. 미국 국민들에게 군축을 약속한 아이젠하워 입장에선 이승만의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 행보를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그러나 이승만이 누군가. 집요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는 이후에도 계속 베트남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1958년 남베트남을 방문,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군사 및 경제 협력을 논의했고 이듬해엔 태권도 시범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결국 파병 논의도 없던 일이 된다.

 #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증언도 현대사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 그는 지난 2008년 8월 중앙일보에 비화를 공개하고 5년 후 별세했다.

 “박 대통령 때 파월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 전, 이승만 대통령 때 이미 있었습니다. 월남(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벌써 미국은 월남에 일부 특수부대 요원을 투입하고 아주 극히 부분적이지만 개입을 하고 있었고요.”

 고 딘은 이승만에게 전투 경험이 많고 게릴라전 경험이 있는 지휘관과 전투부대를 보내줄 수 없냐고 요청했고 이 대통령이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낸다면 육군에선 저를 보내야겠다는 논의를 마친 상황이었어요. 그때 내가 육군본부 작전과장을 거쳐 5사단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5·16이 나서 유야무야 되는가 했더니 당시 참모총장 김종오 장군이 나를 불러요. 고 딘 대통령과 이 대통령이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채 장군이 가야 될 것 같다고 말이죠. 그런 비화가 있었다고요.”

 이처럼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부 때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남베트남 측과 약속이 있었다.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용태 의원과 정보부 차장보였던 석정선 씨가 극비리에 남베트남을 방문, 파병에 따른 구체적 협의를 가졌다는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 베트남전은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50년대는 프랑스, 6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만의 전쟁이었다. UN의 깃발 아래 수십 개 나라가 참전한 한국전쟁과는 그 성격이 판이했다.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본질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는 비판 속에 소련과 동구는 물론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조차 반전 기운이 높아갔다.

 급기야 1968년 파리에서 점화된 ‘68혁명’에선 베트남전 반대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베를린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도쿄까지,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대부분의 도시를 반전 구호로 격동시켰다.

 이처럼 세계가 베트남전 반대를 중심으로 소용돌이 치는 와중에 단 한 곳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서울이었다. 서울은 고립된 섬처럼 ‘68혁명’을 조용히 비껴갔다. 베트남과 같은 분단국가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철저하고 강력하게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특수성은 박정희 정부가 미국과 진행한 파병 협상에선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다. 다음 글의 주제다.

 PS : 베트남전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든 한국군 파병은 미군 철수와도 연동됐던 사안으로 우리 안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파월 용사들의 ‘핏값’은 ‘대일청구권 자금’ ‘중동 건설특수’ ‘서독으로의 광부 간호사 파견’과 함께 60, 70년대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킨 4대 원동력이었다.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바친 5000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생존 참전 용사들의 편안한 여생을 기원한다. 그들은 대부분 국가의 명령에 따라 묵묵히 베트남에 갔었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