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베트남 파병 의사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5·16이 일어나자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격)이던 박정희를 불신했고 심지어 ‘변형된 공산혁명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덜레스에서 암살되고 존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은 주한미군 중 2개 보병사단을 베트남에 보내려 했다. 존슨 대통령은 또 베트남 전비가 급증하자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 감축’도 고려하고 있었다.

 박정희 역시 이 같은 미국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래서 미군이 빠져나갈 경우 초래될 안보 부담을 우려, 파병을 다시 제안했다.

 단독으로 베트남전을 치르던 미국은 국제여론도 안 좋아 연합군 외양을 갖추려 했다. 이와 함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참전 미군을 공군과 해군 위주로 재편하려고 했다. 지상군 일부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나라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60년대 경제와 군사력 모두 북한에 밀리는 상황이라 주한미군 철수는 국가안보상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양국의 이해가 일치했던 것이다.

 1964년 9월 의무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시작으로 1967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전투 사단이 베트남에 파견된다.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 2여단(청룡부대) 그리고 육군 9사단(백마부대)이 그들이다.

 파병 결정이 나자, 박 대통령은 각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불러 파병 소요 기간을 물었다. 육참총장이 “최소 3개월은 필요하다”고 하자 해병대사령관은 “중대급은 즉각, 대대급은 24시간, 연대급은 48시간, 사단급은 7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보고, 계획에 없던 해병대가 포함된다. 9사단 추가 파병은 미국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상시 5만 병력의 국군(누계 30만)이 파병됐고 이들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총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 베트남 파병을 추진했던 이동원 외무장관 자서전(1992년)을 보면 협상 이면을 알 수 있다.

 1964년 10월 1일. 미 국무성의 윌리엄 번디 극동담당 차관보가 방한했다. 그는 이튿날 박정희를 만나 “존슨 대통령은 미국의 어려운 처지를 각하께 잘 말씀드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기다렸다는 듯 “언제라도 미국을 도울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다.

 당시 이동원은 박정희에게 “미국이 지금 머리를 숙이는 것은 다급하기 때문”이라며 “이럴 때 최대한 챙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는 줄다리기 끝에 파병 한국군이 사용하는 물자·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구입한다는 ‘바이 코리아’ 정책 등 여러 지원책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과의 논의가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박정희는 전투수당 협상 등에서 지렛대로 삼기 위해 국내의 파병 반대 여론을 미국에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10·26 박정희 시해’의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이었던 차지철이다.

 # 박정희는 국회 외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차지철을 은밀히 불러 ‘파병 반대’ 활동을 지시했다. 그날부터 국회 도서관에 틀어박혀 베트남전을 파기 시작한 차지철은 얼마 안 가 국회 안팎에서 맹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 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공화당 실세의 베트남 파병반대 목소리는 반향이 컸다.

 문제는 협상이 끝난 뒤에도 그의 ‘맹활약’이 계속됐다는 데 있었다. 어느 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그를 불렀다. 유신 말기 미국으로 망명, 반 박정희 활동을 벌이다 ‘암살자에 의해 마취된 채 파리 교외 양계장의 대형 사료분쇄기에 들어갔다’(‘김형욱 회고록’ 저자 김경재 증언)는 그 김형욱 맞다.

 “거 왜 계속 떠들고 다니는 거요.” 이에 차지철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월남전은 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는 베트남 인민들의 민족해방전쟁이에요! 민족! 해방전쟁!”

 독학으로 급격히 의식화된 차지철은 어느덧 진실의 일단에 접근했던 것이다. 베트남전에 대해 서구와는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던 당시 한국 사회. 그 창백한 담론문화를 강타한 ‘전환시대의 논리’(이영희)가 세상에 나오기 무려 10년 전의 일이었다.

 차지철의 입은 박 대통령이 그를 불러, 거두절미 ‘임자, 이제 그만 좀 해’라고 말한 후 닫혔다. 그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어갈 때, 주군의 변심 이유는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다음 편은 베트남전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대응이다.

 PS : 차지철을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박정희에게 추천한 사람은 바로 육영수 여사였다. 그의 여성 관계가 깨끗했고 기독교 신앙이 깊은 데다 술담배도 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취임은 육 여사가 사망한 직후 이뤄졌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