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토박이 ‘광천동 청년 용준씨’를 보고
철필로 5·18 진실 새긴 청년 박용준의 삶
한강 작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할 당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더 이상 소설을 진척시킬 수 없다고 체념하던 차에 5·18 당시 항쟁에 나섰던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고 밝혔다.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됐다.”
5·18 당시 ‘양심’이 무엇이냐 물으며 끝까지 맞서 싸운 스물다섯 청년 박용준. 그와 같은 마음으로 싸웠을 이름 없는 이들을 이끈 ‘양심’이 45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극단 토박이가 45주년 5·18민중항쟁 기념공연으로 지난해 첫 선을 보였던 연극 ‘광천동 청년 용준 씨’를 지난 23일과 24일 광주 동구 민들레소극장에서 선보였다. 극단 토박이는 ‘오월 휴먼시리즈’의 첫 인물로 5·18 당시 시민의 언론이었던 ‘투사회보’를 필경한 청년 박용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 신군부의 폭압에 모든 언론이 광주의 참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할 때 뾰족한 쇠철필로 당시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또렷이 새겼던 건 스물다섯살 청년이었다.
그는 고아로 자라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학비를 벌어 야간고등학교를 마치고 신협에서 근무하던 직원이었다. 1978년 일단의 노동운동가들이 광주 광천동에 노동야학 ‘들불야학’을 설립했고, 광천동 주민운동의 대표자로 여겨졌던 김영철과 가까운 관계였던 박용준도 들불야학에 합류하게 된다.
글씨를 잘 썼던 그는 들불야학 강학 시절 교재나 나무도장, 간판 제작 등을 도맡았고 다가온 1980년 5월 군인들에 의해 봉쇄된 광주에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들불야학에서 투사회보 필경을 전담했다.
수천 장의 투사회보를 썼던 그의 손은 살갗이 벗겨지고 퉁퉁 부어 있었지만 5월 27일 마지막 항쟁 날 그는 총을 들고 자신을 진심으로 보듬어 안아준 광천동 형들과 함께 죽음으로 항쟁했다.
극은 투사회보 1호에서 10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해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다. 또한 주인공의 분신을 통해 내면에 잠재된 상처, 불신, 갈등, 바람, 희망 등 감추어진 심리를 들여다본다.
스물다섯 청년이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항쟁할 수 있었던 그날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2024년 12월 3일 국회 앞으로 나가 무장한 군인들과 장갑차 앞을 막아섰던 시민들의 모습에서 그 마음을 비춰본다.
집회 현장에 나가 시민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 지 물었을 때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나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구나 싶어 힘이 난다’는 것이었다.
두 계엄으로 촉발된 시민들의 항쟁 속에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무언가를 짓누른 양심, 언제 끝날 지 모를 막연함과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나와 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집단의 힘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스물다섯 청년 박용준이 해답을 줬을 ‘소년이 온다’의 한 문장이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자신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군인들을 이기지 못하리란 걸 알았음에도 16살 소년 동호를 끝까지 남게 한 건 ‘양심’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진 도덕의 무게, 그 무겁고 단단한 것이 소년을, 시민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두려움 앞에 맞서게 했다.
유시연 기자 youni@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