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퀴어 동사무소 에세이]

 성소수자는 여기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연재는 광주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조명합니다.

 연재의 타이틀인 ‘퀴어 동사무소’는 퀴어 시민이 지역사회에서 ‘보이는 존재’로 자리 잡고,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기록하고 돌보는 공공 공간을 상상하는 의미입니다. 성소수자들은 단순한 정체성 이상의 존재이며, 다양한 차별과 연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이 에세이들이 누군가에겐 용기와 위로가, 또 누군가에겐 이해와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이미지 출처=광주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인스타그램.
이미지 출처=광주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인스타그램.

 꽃다지의 ‘바위처럼’이라는 노래는 운동권에 발끝이라도 담구어 본 사람이라면 모르기 쉽지 않은 노래다. 민중가요 중에서 가장 기초 단계에 위치하고, 율동 역시 무척 단순하다. 나 역시 학생 운동의 끝물에서 유일하게 배웠던 율동이 바위처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러니 이 노래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반갑고 신나는 노래였다. 잊어버린 율동을 어색하게 주워섬기며 함께 부르기 딱 좋은 노래. 그리고 몇 년 전, 퀴어의 아이돌 이반지하가 개사해 부른 ‘바이처럼’의 원곡.

 일종의 말장난이다. 바위와 바이. 발음의 차이가 거의 없는 두 단어가 교차되며 이 노래는 뜬금없이 나 혼자만의 퀴어성을 지녔다. 개사된 노래도 원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이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이처럼 살자꾸나

 오로지 바위가 바이가 되고 바이가 바위가 되어 양 단어 모두 단단함을 심어준 이 노래를 왜 꺼냈냐면. 나는 바이섹슈얼, 양성애자다. 나는 이 노래가 가끔 나의 주제곡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소수자이면서 양성애자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더 빡세다. 솔직히 ‘왜?’싶을 수 있다. 성소수자가 아닌 것처럼 이성애를 할 수도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소위 ‘탈반’이라는 것을 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이런 편견이야말로 바이섹슈얼을 이중의 차별에 밀어넣는다.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남자도 여자도 (혹은 젠더퀴어도) 만나는 사람’으로 지목되어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갖는다. 난 이 사실이 부끄럽진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 하필 남자거나 여자거나 혹은 젠더퀴어였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이 죄는 아니지. 그러니 현 사회에서 나는 성소수자임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데에 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이성 연애에서 내 정체성이 아픈 가시가 되기도 했다. 아끼고 사랑한 이성 애인에게 나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기어코 애인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돌아온 답변은 “앞으론 그 사실을 복기하게 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그러니까 입을 다물라는 것. 애인에게 돌아온 답이 꽤 충격적이었던 덕에,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해당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심리상담사는 “이성애와 동성애를 같은 시기에 동시에 할 것도 아닌데, 왜 애인에게 커밍아웃을 굳이 해야 하죠?”고 말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몰이해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커밍아웃을 양다리 걸치겠다고 허락 받을 때 하라는 소린가?

 성소수자로서의 사회적 차별을 감당한다 쳐도, 내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는 건 성소수자 문화 내에서의 편견도 있다. 아, 정말 막막하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들어가면 흔하게도 양성애자 혐오를 마주한다. 언제든 남자/여자를 만나겠다고 자기 애인을 버리고 결혼하러 가는 이들. 이성애자들에게 성병을 옮겨와 퀴어 사회에 퍼트리는 이들. 박쥐 같은 정체성. 다른 건 다 좋은데 내 애인은 양성애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 앞에서, 나는 다시 침묵한다. 이들 앞에선 이성애도 한다는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 이성애를 하든 동성애를 하든, 어느 애인에게도 내 소수자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하나로 집합되지 않는다. 레즈비언은 레즈비언의 문화가 있고, 게이는 게이의 문화가 있고, 트랜스젠더도, 무성애자도, 그들만의 공감대와 문화가 있다. 하지만 바이섹슈얼은 어디에도 속할 수 있기에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게다가 여전히 양성애자와 범성애자의 구분은 모호하고, 여러 성별을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이 바이섹슈얼인지 팬섹슈얼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저 사랑이라는 마음 앞에 ‘바위처럼’ 흔들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솔직히 사랑하는 게 어느 곳에서도 죄가 아닌 세상에서 살고 싶다.

 글=바리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