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 동원’ 일 역사 현장을 가다]<3>고려미술관
재일교포 1세대 정조문 씨 우리 문화재 지키기 ‘결실’

▲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 미술관을 세운 고 정조문 씨의 아들 정희두 상임이사가 입구에 서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것은 조선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은 사이 일본으로 강제유출된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

 1988년 문을 연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은 그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의지가 맺은 결실이다.

 일본 땅에 우리 문화재를 전시하는 미술관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재일교포 1세대 고 정조문 씨다.

 1925년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6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광복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부두노동자, 개인 사업 등을 하며 살았던 그가 미술관을 세우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일본 교토 기온 거리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마주친 조선백자였다.

 무엇에 홀린 듯 조선백자를 구매한 이후 그는 40년 간 전 재산을 쏟아 일본 전역을 돌며 일본으로 강제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

 이렇게 모인 문화재는 약 1700점. 도자기류 300여 점을 비롯해 서화 150여 점, 금속 공예품 50여 점 등이다.

 고려미술관은 정기적으로 특정 주제를 정해 문화재 전시를 하고 있는데 지난달 24일 찾아갔을 땐 조선 왕조의 행운을 가져다 준 새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백자, 청자, 병풍 작품 등을 볼 수 있었다.
 
▲40년 간 전재산 들여 1700점 모아
 
 각 문화재마다 숨은 이야기가 상당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고려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정희두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상임이사는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설명하며 “일본이 한국에 나쁜 말도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한국 문화를 높히 평가하고 아끼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에 소장된 목재 가구의 경우도 일본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던 것들이 많은데, “실 생활에서 사용하다가 살림이 어려워져 골동품 장사꾼에 넘긴 것들도 있다”며 “다행히 이 가구나 문화재들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조문 씨는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함부로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문화를 모을 때마다 “잘 돌아왔다”는 말을 했다고.

 1층 전시실 한 켠에는 백자와 청자가 전시돼 있었다. 정 상임이사는 “고려시대 무덤 속에 있던 작품들이 도굴됐다가 일본에 건너왔다”며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고 말했다.

 특히, 일본이 청자를 가장 탐냈다고 했다. “하얀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많이 전해졌지만 청자를 만드는 것은 일본인들에겐 굉장히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시 주제인 새를 볼 수 있는 화조도 병풍도 보였다. 정 상임이사는 “모든 장면에 새가 들어가고 있는데,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꿩이 그려진 것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고려미술관엔 병풍 작품이 20개 정도 있는데, 이렇게 조선시대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병풍은 2개 밖에 없습니다.”

 정 상임이사는 “수집한 병풍 대부분이 일본 병풍에다가 (그림만)새롭게 붙인 것들이다”고 설명했다.
 
▲5층 석탑 구매에만 15년 걸려
 
 100여년 전 서양식 생활이 퍼지기 시작하며 일본인들은 식탁에 음식을 놓고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해 병풍의 높이가 더 높았다. 특히, 일본 병풍에는 우리나라 병풍엔 없는 다리가 있다.

 그림은 조선시대 것이지만 겉 형태는 일본 것인 병풍들. 정 상임이사는 “얼굴이나 핏줄을 조상님들에게 물려 받았지만, 우리 말과 역사, 문화를 모르고 살아가는 재일교포들을 보면 병풍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미술관 2층에는 전통 생활상을 재현한 방과 가구들. 항아리 등이 전시돼 있었다.

 미술관 밖에 있는 5층 석탑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려는 정조문 씨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 같다.

 정조문 씨가 5층 석탑을 구매하는데 걸린 기간만 15년, 쏟아부은 돈도 20억 원에 달했다.

 정 상임이사는 “일본은 지진이 많아 한국에서 넘어온 석탑이 깨지는 등 훼손이 심했다”며 “5층 석탑은 아버지가 정말 목숨을 바쳐 사오신 것이다. 지진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치까지 다 돼 있다”고 설명했다.

 고려미술관은 하루 방문객이 많을 때 25~30명 정도인데, 한국 문화가 궁금해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상당수였다.

 정 상임이사는 “왜 한국미술관이나 조선미술관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미술관 이름을 ‘고려미술관’이라고 한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북도 남도 아닌 통일된 나라에서 넘어오셨죠. 고려미술관이란 이름 속에는 반드시 통일을 희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힘들게 사업가로 성공한 뒤 “내가 돈을 버는 것보다 (고국에)꼭 기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한 정조문 씨는 생전 조국의 분단을 너무나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땅을 밟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한 이유다.
 
▲“통일 조국에 고려미술관 기증” 유언
 
 1988년 고려미술관이 개관하고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선 “통일된 조국에 고려미술관을 기증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년이면 고려미술관 개관 30년이다. 정조문 씨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면서 그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정 상임이사는 “고려미술관엔 고향 땅에 돌아갈 때 그동안 모은 우리 문화재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남겨져 있다”며 “이러한 뜻을 이어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문화재를 모으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문화유산을 보러오는 한국 분들은 많지만 재일교포들의 생활 형편이나 역사를 답사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면서 “일본에 남은 동포와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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