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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며 들과 산이 빛을 잃어갈 무렵, 대부분의 나무는 낙엽을 떨구고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한다. 하지만 남도 해안가의 어느 그늘진 숲길에 들어서면, 뜻밖에도 보랏빛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 군락이 있다. 잿빛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히 빛나는 보랏빛 열매들. 바로 천선과나무(天仙果木), 어릴 적 무던히도 배고팠을 때 따 먹었던 추억 어린 나무다. 가을 숲의 침묵 속에서 이 나무의 열매는 마치 잔잔한 미소처럼, 혹은 소리 없는 위로처럼 남아 계절의 끝을 향해 오는 이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천선과나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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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빛깔이 사그라드는 깊은 가을을 지나 이제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을 한겨울. 우리는 한라산이나 지리산의 능선, 혹은 오래된 사찰의 뜨락에서 시간을 초월한 듯한 숭고한 생명과 마주한다. 모든 것이 잠든 잿빛 풍경 속, 유독 짙푸른 생기를 뿜어내는 잎과 그 위에 보석처럼 박힌 선명한 붉은 열매. 이 강렬한 대비의 주인공이 바로 ‘주목(朱木)’이다. 주목은 화려한 향기 대신 묵묵한 존재감으로, 혹독한 계절을 견뎌내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숭고함을 간직한다. 이런 아름다운 주목을 산 정상부에서 만나면 왠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주목(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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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갈 무렵, 남도지역의 사찰이나 아파트, 공원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불어온 달콤한 과일 향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될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화려한 꽃은 보이지 않지만, 이 매혹적인 향기의 근원은 바로 작고 겸손한 주황빛 꽃을 피운 금목서이다. 이 향기는 단순한 냄새를 넘어,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매개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작은 꽃송이들이 뿜어내는 강력한 향기는 주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이 계절 밤낮없이 우리에게 작은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듯하다. 금목서(金木犀)는 그 이름에 특징이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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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저녁 기온이 쌀쌀해진 초가을, 남도 지방에는 이례적으로 9월 한 달 내내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 장마는 6~7월에 끝나지만 올해는 가을에 장마가 이어지면서 벼 농사는 물론 들과 숲의 식물들까지 긴장 상태이다. 이 시기에 식물들은 열매를 성숙시키기 위해 비바람을 견디며 전략을 세운다. 남도의 해안숲이나 도심내 조경수로 심어진 후피향나무는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 비바람 속에서도 빨간 열매를 맺으며 종자 결실에 정성을 다한다. 이 식물은 일부 개체가 수꽃만 피우고 다른 개체가 양성화를 피우는 수꽃 양성화 딴그루라서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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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날 즈음 습지를 찾아가면, 수면 위에 둥근 잎들이 넓게 퍼져 있고 그 사이로 환한 노란 꽃들이 눈부신 햇살처럼 반짝인다. 바로 노랑어리연(Nymphoides peltata)이다. 멀리서 보면 수련과 비슷해 보이지만, 꽃은 훨씬 작고 선명한 노란빛으로 습지를 환히 밝혀준다. 영산강과 황룡강에 위치하고 있는 용산습지와 장록습지, 광주의 대표적인 저수지인 대야제와 전평제 같은 남도의 습지에서는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이 꽃들이 무리를 지어 피어나고, 드넓은 수면을 황금빛 융단처럼 수놓는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노란 꽃송이는 습지를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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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끝자락, 남도의 숲길을 걷다 보면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 보랏빛 융단이 드리워진 듯한 장관을 만난다. 바로 8월에서 9월 사이 절정을 이루는 여름 풀꽃, 맥문동(麥門冬)이다.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는 수수하지만, 무리지어 만개한 연보랏빛 군락은 숲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광주광역시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숲길이나 서울 국회의사당 앞 가로수 밑에서도 동시에 피어난 맥문동은 도심 속 그늘을 은은히 물들이며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늦여름 숲의 나른함을 깨우는 이 보랏빛 향연은, 우리 풍경 속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가장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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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8월이 오면, 우리 국토 곳곳에 피어나는 무궁화를 보며 자연스레 광복절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광주시의회 건물 외벽에 그려진 무궁화 로고와 그 앞 광장에서 일렬로 피어난 무궁화 꽃은 누구의 시선도 쉽게 머물게 만든다. 지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시의회 로고에 무궁화가 담겼다는 사실은, 이 꽃이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얼과 품격을 지켜온 존재이자 오늘날에도 시민과 함께 숨 쉬는 상징이라는 점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듯하다.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은 한자어 ‘무궁(無窮)’,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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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밀려오는 여름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계절 속에서, 무각사 마당에도, 아파트 화단에도, 앞산뒷산, 도로 가로수 옆에도 붉은빛 꽃을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는 문득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무더운 계절에 피어나는 꽃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은 배롱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그곳에 들어서면 정적을 깨는 것은 바람과 물소리뿐. 뜨거운 여름과 소낙비 속에서도 푸른 그늘 위에 수놓아진 붉은 꽃들은 더위를 식히고 마음에 평온을 건넨다. 햇살에 타오르듯 붉게 피어난 배롱나무 꽃을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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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가 더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찜통더위와 물폭탄이 일상이 된 여름, 지난 17일 광주는 하루 만에 426mm의 기록적인 폭우를 맞았다. 사흘 동안 이어진 물폭탄에 영산강과 황룡강, 광주천 물길은 순식간에 불어나 둔치 산책로가 물에 잠기고, 다리 위로 넘실대는 물살은 위태로워 보였다. 장마가 지난 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황룡강 장록국가습지를 찾았다. 익숙하던 풍경은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황룡강변을 푸르게 채우던 버드나무 숲은 일부가 힘없이 쓰러졌고, 어떤 나무는 뿌리째 뽑혀 강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늘 아래 살던 새와 작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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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린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완도 갈문리와 대문리 해안숲에서는 황금꽃 핀 모감주나무군락이 눈길을 끈다. 올여름도 열돔현상으로 도심지역은 평균 36-37도를 기록하고 밀집지역은 37도를 초과하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그 나무 아래에 들어서면 공기가 한결 상쾌해진다. 가지마다 달린 황금빛 꽃송이들은 마치 작은 비단 등불을 수없이 매달아 놓은 듯 화사하고, 그 아래 드리운 그늘은 아담한 황금 우산처럼 포근한 쉼터가 되어 준다. 은은한 향기가 열대야와 폭염을 뚫고 바닷바람으로 번져 나와 달아오른 몸과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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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자락, 후끈한 습기가 뺨에 달라붙는 날. 그런 날이면 공원 한편에서 조용히 피어난 자귀나무가 눈길을 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에서도 공원 가장자리 자귀나무 아래에 들어서면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가지마다 피어난 분홍색 꽃들은 마치 실크 부채를 펼쳐 놓은 듯하고, 그 아래 드리운 그늘은 녹빛 우산처럼 시원한 안식처가 되어 준다. 은은한 꽃향기가 습도를 뚫고 퍼져 나와 달아오른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다. 쏟아지는 햇살에도 자귀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연이 주는 작은 위로를 느낀다. 자귀나무는 밤만 되면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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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길목, 무등산국립공원 평두메습지 가는 길에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가 있다. 가지가 층층이 벌어져 마치 정성껏 쌓아 올린 탑처럼 보이는 나무, 바로 층층나무다. 연둣빛 새잎 사이사이로 자잘한 흰 꽃 무리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가까이 다가서니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가지 끝마다 피어난 꽃송이에 꿀벌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 이내 다음 층으로 느릿하게 날아오른다. 거친 껍질에 손바닥을 대어보면 느릿하게 흐르는 수액의 맥박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이러한 순간, 세상의 모든 소란이 스르르 잦아들고 마음속에도 잔잔한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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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깊어질 무렵, 장록국가습지를 따라 걷는 길은 언제나 특별하다. 하천을 따라 은은히 퍼지는 보랏빛 향기, 그 향기의 주인공은 바로 멀구슬나무다. 가지를 드리운 연보랏빛 꽃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릴 때면, 그 아래 조용히 흐르는 물살마저도 꽃잎을 조심스레 실어 나르는 듯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습지센터 예정지에 대한 주민설명회가 끝난 어느 저녁, 현장답사를 겸한 산책길에서 그 향기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문득, 그 오랜 시간 지탱해주었던 이곳의 기억을 되짚게 되었다. 대학원 시절의 대부분을 장록습지를 바라보며 보냈다. 아이들은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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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날카로운 찬바람이 지나고 따스한 햇살이 대지를 데우기 시작하면,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봄꽃이다. 그중에서도 철쭉은 산과 들, 도시의 공원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봄의 전령이다. 연분홍, 진분홍, 보랏빛, 때로는 하얀빛으로 피어나는 철쭉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열게 한다. 특히 5월 중순 무렵이면 무등산국립공원 서석대 암벽 사이로 산철쭉과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탐방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철쭉의 이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자 ‘척촉’은 ‘질척거리며 걷다’ 또는 ‘머뭇거리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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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진 봄이 훌쩍 지나고 성큼 여름이 다가온다. 이 계절에는 흑산도와 영산도, 장도에 흑산도비비추가 꽃대를 높이 올리느라고 무척 애를 쓴다. 게다가 보랏빛 작은 나팔꽃이 차례대로 피어나 벌과 나비에게 손짓하며 유혹하고 있다. 반짝거리는 녹색 잎은 손바닥 크기만 해서 싱그럽고 탐스럽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이곳저곳에 보랏빛 물결이 일렁이고 꽃향기가 그윽하다. 누구라도 보랏빛 꽃에 탐스러운 녹색 잎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저 온종일 꽃숲에서 놀아도 지치지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충만해지는 듯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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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털같은 새순이 조용히 땅을 밀어 올린다. 단풍잎처럼 생긴 새순은 우산 모양으로 차츰 자라난다. 바위와 땅이 만나는 곳이나 바위틈새에서 꼿꼿이 잎을 내고 꽃을 피워낸다. 유난히 잎이 커서 병풍처럼 펼쳐져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꽃대는 식물 전체의 2~3배로 높이 올려 화려하지 않지만 흰색으로 핀다. 꽃대가 높다 보니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피는 눈물 나게 작은 꽃, 어리병풍의 고고한 자태가 반갑기만 하다. 어리병풍은 병풍쌈보다 잎이 작고 어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식물 종들은 자생식물 중에서 잎이 가장 크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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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흑산면 영산도는 육지에서 멀기도 먼 섬이다. 목포에서 84㎞, 진도에서 60.4㎞ 떨어져 있고 대흑산도·소흑산도·대둔도(大屯島)· 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루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 아름다운 섬이다. 이런 외딴 곳에서만 멸종위기종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안타깝고 애석하기만 하다. 석곡을 만나기 위해 이장님과 지역주민의 안내를 받아 운무가 낀 바위를 따라 절벽을 내려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흑염소가 다니는 좁은 길을 몸을 낮춰 내려갔다. 정신없이 길을 따라가다 보니, 파도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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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아무 때나 피지 않는다. 한 계절이 저물고 다시 돌아오는 순환 속에서, 어떤 꽃들은 짧은 순간을 위해 오랜 기다림을 감내한다. 멸종위기나 희귀한 식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 보살펴도, 그 계절이 아니면 꽃을 볼 수 없다. 피어나는 순간을 놓치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때로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경사진 바위들 사이, 이끼가 자리한 틈에서 피어난 병아리난초를 만난다. 분홍빛 꽃들은 마치 봄나들이 나온 병아리처럼 앙증맞게 줄지어 선 듯, 때를 맞춰 차례로 피어난다. 척박한 암석이나 바위 위에서도 새벽이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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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 계곡을 지나 세석평전으로 오른다. 이곳은 해발 1000m에 자리한 지리산국립공원의 핵심보호구역이자 남도의 자연생태계를 대표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매년 5월, 찬란하게 피는 얼레지를 만나면 반갑고도 신이 나서 콧노래가 절로 난다.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 무리 지어 피는 얼레지꽃은 6월 안에 꽃과 잎이 모두 지거나 사라지기 때문에 그 계절에 보지 않으면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 가던 길도 멈추고 얼레지와 눈을 맞추며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얼레지는 꽃에 얼룩무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완전히 피면 꽃잎은 뒤로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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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를 따라가다 계곡에서 만난 약난초가 꽃이 폈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까이 오면 마음이 설렌다. 조만간 약난초 꽃이 피어날 시기이기 때문이다. 꽃대를 세우고 층층이 꽃을 아름답게 피워내느라 애쓰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자주빛이 섞인 갈색꽃 20여 개가 무리지어 아래로 피고, 난초과의 특이한 입술 모양의 꽃잎은 홍자색을 띤다. 그 꽃잎 속에는 아름다운 꿀주머니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이렇듯 아름다운 고운 속살을 보려면 허리를 숙여 반가운 인사를 건네야 한다. 약난초는 한방에서 비늘줄기와 뿌리를 약재로 사용해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
남도 풀꽃나무
김영선
2025.02.2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