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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전라도’라는 이름을 쓴 지 1000년째가 되는 해다. 고려시대 현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서기 1018년, 앞서 강남도와 해양도로 나뉘어 있던 지역을 하나로 묶어 전라도라고 칭한 것이 그 시초다. 그로부터 1000년째를 맞이해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는 사업들이 펼쳐졌다. 전라도는 왕왕 ‘호남’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전라도와 호남은 묘한 어감의 차이를 주는 듯하다. 전라도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명백히 행정구역 명칭으로 시작된데 비해 호남은 그와 약간은 결이 다른 지역 명칭이란 느낌을 주곤 한다.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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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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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아니라면 쌍촌동에 있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청에 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광주교대구청은 2006년 임동성당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필자는 수 년 전에 일 때문에 출장삼아 교구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교구청 건물이나 주변 정원을 둘러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광주대교구청 부지는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알려져 있고 줄여서 평생교육원이라 부르곤 한다. 그런데 이 땅에 과거 ‘응세농도학원’이란 사립 농업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농촌지도자 양성 위한 대규모 실습지 응세농도학원은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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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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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8만㎡, 입주한 상점 1000여 개. 양동시장의 규모다. 물론 이것은 넓은 의미의 양동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동시장주식회사가 관할하는 좁은 의미의 양동시장도 면적 1만㎡에 입주상점 300여 개의 적지 않은 규모다. 양동시장은 초기 이름은 ‘천정시장’이었다. 시장이 처음 이 자리에 생긴 것이 일제강점기 때였고 당시 양동의 이름이 천정(泉町)이었기 때문이다. 또 천정이란 이름은 양동 255번지 아래에 있었던 샘에서 비롯됐다. 이 샘은 2014년 도로 확장으로 매립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양동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서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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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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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변의 큰 장과 작은 장터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1921년부터 나왔다. 이 시기는 3·1운동 직후다. 일제에겐 장터가 만세시위의 진원지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고 그와 관련해 광주에 연대 규모의 일본군을 상주시키려 했던 움직임이 일던 때이기도 했다. 장터의 통합은 처음부터 장터 위치의 변경과 광주천 개조공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24년 1월 장터를 당시 동네이름인 ‘교사리’로 이전한다는 결정은 확정지었다(조선총독부 관보 1924년 1월15일자). 1926년 6월에는 광주천 가운데 시내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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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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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10분 내 거리, 필자가 우리 동네라고 생각하는 공간에는 4군데의 대형마트가 있다. 처음 필자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올 때만해도 동네엔 대형마트란 게 없었다. 고만고만한 작은‘슈퍼’가 전부였다. 무슨 택지라고 하여 이사는 왔건만 사실 아파트 건설업체들이 분양을 위해 가져다 붙인 짝퉁 택지라서 그런지 토지구획정리만 한 땅에 아파트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상가랄 것은 없었다. 그래서 승용차로 5분 정도인 큰길 네거리까지 나가 장을 보곤 했다. 큰 아이도 같은 거리만큼 걸어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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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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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장이 처음 있던 북문 앞을 떠나 광주천으로 옮겨온 때는 임진왜란 전후로 한 시기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장소가 구체적으로 광주천의 어디쯤이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적어도 18세기에 광주천변에서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어 열렸는데 큰 장터는 지금의 광주교 아래쪽, 작은 장터는 부동교 일대에 있었다. 그런데 두 장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광주천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광주천은 지금처럼 인공제방을 따라 거의 일정한 강폭과 일직선에 가까운 유로를 가진 하천이 아니었다. 갑자기 좁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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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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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나 저자를 뜻하는 한자 시(市)를 보고 있노라면 필자는 뭔가 깃발을 세워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굳이 깃발이 아니더라도 큰 나무나 그에 버금가는 상징물이 있어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였을 것이고 여기서 착안해 만든 한자가 市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잘못된 전제가 낳은 잘못된 결과이기도 했다. 누군가 깃발을 꼽아 놓거나 큰 나무를 심어놓았으니 사람들이 모였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그처럼 인위적인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을까? 큰 나무 심었으니 사람들 모일까 더구나 이런 상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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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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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장을 얘기하면 으레 규모가 큰 장을 말하기 쉽다. 지금의 양동시장의 전신이 된 광주 큰 장이나 송정역이 생기면서 등장한 송정장 같은 곳이다. 혹은 이들 장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지금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비아장 같은 곳을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광주에는 기억 속에서도 존중받지 못한 채 사라진 장들이 많다. 그들 가운데 ‘신장’이란 곳도 있다. 송정시내를 거쳐 나주 방면으로 가려는 사람은 대부분 국도13호선을 이용한다. 이 도로는 중간, 즉 광산구 동곡동과 나주 노안면 사이에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를 넘어간다. 지금 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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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4.01.0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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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장은 여러 차례 자리를 바꿔 열렸다. 본래 광주읍성의 북문 바깥인 지금의 충장로4가 일대에서 열렸고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에 광주천 쪽으로 이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적어도 18세기 후반엔 이미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분화됐던 것 같은데 어느 장이 먼저 광주천에 자리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20년대까지 존속했던 두 장의 위치로 보건데 큰 장은 광주 북문에서 한참 아래쪽인 공북루 일대(광주일고 근처)에서 열리다가 점차 광주천 둔치인 지금의 광주대교 일대로 확장된 듯하다. 반면에 작은 장은 지금의 세칭 ‘황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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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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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광산구 ‘첨단지구’로 부르는 택지지구의 상당부분은 과거에 ‘비아면’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곳엔 오래전부터 ‘비아장(飛雅場)’으로 알려진 오일장이 열렸다. 비아장은 종종 ‘아산장(雅山場)’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름이야 어떻건 이 장은 지금도 1일과 6일이면 첨단지구와 장성군 남면 경계선에서 열린다. 19세기 말엽 비아장과 멀지 않는 곳에 박노면(1860~1913)이란 선비가 살았다. 광주지역을 벗어나면 그 이름을 아는 이들이 드물 정도로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선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19세기 말엽엔 한학을 한다는 게 그렇게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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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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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소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식료다. 아직 장이 태동하기 훨씬 전인 삼국시대에도 을불(乙弗)이라는 청년은 이곳저곳을 돌며 소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구려 미천왕이다. 그런데 지금은 워낙 흔한 게 소금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해도 소금은 작은 황금이라 불릴 만큼 귀한 존재였다. 소금이 흔해진 것은 넓은 염전으로 상징되는 천일제염 덕분이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천일제염이 등장하는 것은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까지는 오로지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었고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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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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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막 시작될 즈음 광산구 송정리 사람들은 2km 남짓 떨어진 황룡강변의 선암장에서 장을 보곤 했다. 선암장은 꽤 역사가 깊은 장이었다. 적어도 18세기 기록에 나올 정도다. 흥미로운 건 처음 선암장은 장이 열릴 때마다 장터가 달랐다는 사실이다. 18세기 기록에 따르면 2일에 서는 선암장은 황룡강 북쪽 강변인 선암동에서 열렸다. 대략 지금의 선운1지구 내 ‘구장터’라 불렸던 곳이 당시 2일 장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8일에 열리는 선암장은 황룡강 남쪽 기슭이자 당시 행정구역상 나주에 속했던 지금의 장록동에서 열렸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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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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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성종4년(1473) 기록에는 1470년 전라도 무안 땅에서 처음 ‘장문(場門)’이란 이름으로 장이 열렸다는 신숙주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장은 점차 영산강 상류 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1480년대 전라관찰사 김종직은 나주객사 앞 망화루에 올라 쓴 시에서 영산강변에 열리는 물가 시장인 수시(水市)를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 이예라는 사람은 나주의 풍속을 거론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점포를 열어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광주엔 언제부터 장이 섰을까? 광주에서 장의 시작을 다룬 기록은 없을까? 엉뚱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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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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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하나 골라보세요. “장삿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돛대가 연이어 있고 사람들이 수없이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팔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지명)이 붙었다.” 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나오는 충청도 은진현에 대한 설명이다. ② 은진현은 덕은군과 시진현이 합쳐져 생겼다. ③ 여기서 말하는 시진은 ‘관촉사 미륵불’과 가까운 곳이다. ④ 시진(市津)이란 지명은 1470년 전라도 땅에서 장이 출현한 뒤에 생겼다. 정답은 ④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오늘날 충남 논산시 은진면 일대를 가리키는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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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2.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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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내다보면 딱 한 가지 사실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가 있다. “뭔가를 소비했지. 그래 난 오늘 존재했던 것 같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가게에 들러 뭔가를 산다. 용케 담배 한 갑, 볼펜 한 자루를 사지 않고 지나가나 싶은 날에도 저녁 때면 식당이나 술집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사게 된다. 24시간 편의점 때문에 이젠 뭔가를 사는 데에 시간의 구애도 받지 않는다. 예전엔 야간통금이 되기 훨씬 전부터 대개 상점은 문을 닫았다. 상점의 모습도 상당히 좋아졌다. 1960~70년대만 해도 시골이나 여느 도시의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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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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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조선시대에 장사는 말업(末業)으로 간주됐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에서 맨 아래쪽에 있던 직업이었다. 이때 말업이란 말에는 가장 천한 생업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동시에 이 말에는 다른 일을 해서는 도저히 입에 풀칠을 하고는 살 수 없는 경우, 최후에 선택하는 생업이란 의미도 있다. 장사, 사농공상 신분제도 맨 아래 역사상 생계의 최후 수단으로 말업을 택한 사람들은 많다. 고구려의 미천왕은 젊은 시절에 머슴살이를 거쳐 소금 장사를 했다. 백제의 무왕은 어린 시절에 과부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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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2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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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광주를 묘사한 그림으로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란 작품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567년. 이 해 광주목사 최응룡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동기생들을 광주의 희경루에 불러 연회를 베푼 장면을 담고 있다. 연회의 무대인 희경루는 충장로2가의 옛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누각은 1451년에 처음 건립됐다. 신숙주의 ‘희경루기(喜慶樓記)’에 그 건립과정에 대한 상세한 얘기가 나온다. 건물은 남북으로 5칸, 동서로 4칸이었다고 한다.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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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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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앞 천변좌로엔 석서정(石犀亭)이란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2006년에 건립한 것이지만 사실은 고려시대 말엽 이색(1328∼1396)이란 사람이 쓴 ‘석서정기(石犀亭記)’란 글에 근거해 세운 것이다. 원래 석서정은 광주천 가운데 형성된 하중도(河中島) 안에 있었다. 1380년대쯤 광주목사로 와 있던 김상(金賞)이란 인물이 광주천 치수사업을 한 기념으로 건립했던 것이다. 당시 광주천은 지금과 달리 삶에 대단히 위협적인 하천이었다. 툭하면 범람을 일으켜 주변 농경지와 민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곤 했기 때문이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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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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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1일 산수동의 왕용경(王龍慶) 노인에게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던 터라 노인은 평소 석유등을 켜놓고 생활했다. 그런데 켜놓은 석유등이 넘어지면서 허름한 초가집 전체가 불에 타면서 그 안에 있던 노인도 변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 노인의 나이는 77세. 고향은 중국 산동성, 즉 화교였다. 1930년대 광주에 와 평생 채소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이 날 생을 마감했다. 임진왜란 이후로 광주·전남지역에 중국인들이 공식적으로 발을 대딛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1890년대였던 것 같다. 처음 정착한 곳은 아무래도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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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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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전남에 들어와 채소 재배를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이전부터였다. 공식적으로 목포항이 개항한 것은 1897년.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보다 4년 앞서 이미 목포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들은 채소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광주 이주 중국인들 장사? 농업 뛰어들어 그들이 처음 어떤 채소를 길렀는지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정확히 짚어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이 일찍부터 채소농사를 시작했다는 정황은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심지어 1903년 당시 목포항 감독관(무안감리)이던 김성규(金星圭)가 외부대신에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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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2023.11.12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