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잡을 수 없는 날씨는 가을을 생략하고 만다. 황금으로 물든 영암뜨락을 809미터의 월출산 천황봉에서 내려보고 싶었지만 잦은 비로 볏잎이 아직 푸르딩딩하고 산행길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며칠 바짝 볕이 이는가 싶더니 들판이 휑하니 되어 버렸다. 국화축제, 한옥비엔날레, 마한역사문화제, 베트남 다낭시청 문화체육관광국과 공연단의 방문 등으로 10월말에서 11월이 삽시간에 지나간다. 황금 들녘의 곡식들은 벌써 어딘가의 곳간으로 가 버리고, 비워진 논에는 한가한 곤포사일리지만 뒹굴고 있다. 서른 초입 장흥 천관산문학관에 올랐을 때 돌 위
주말 제안
전고필
2025.11.21 00:00
-
이른 아침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진다. 차로 5분 거리임에도 차가워진 날씨에 더해 안개까지 가로막는데 짐짓 설레임 하나가 대문을 박차게 한다. 10시쯤이면 이불같은 장막은 거두워 질 것이고, 그러면 말끔한 등대 하나가 내 눈에 선연히 박힐 것이다. 일상적으로 내가 걷고 있는 지표면의 높이가 해수면으로부터 20미터 안팎인데, 해발 809m의 월출산 천황봉이 호수 같은 안개를 발아래 두고 돌올하게 얼굴을 내미는 장면이다. 안개 속에서 맞이한 월출산의 아침 그런 일상들이 월출산 아래 사는 개미진 일이다. 게다가 지난
주말 제안
전고필
2025.11.07 00:00
-
가을이 되면 바뻐지는 것이 영산강 유역의 사람들이다. 수확의 계절이니 당연지사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일들이 강변의 사람들을 바쁘게 한다. 바로 대한민국의 뿌리를 형성했던 기질에서 우러나오는 축제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의 의미로서 한가위는 물론, 마을 단위의 각종 행사와 이벤트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산강 문화축제를 하는 나주시는 천년목사고을답게 메가 이벤트로서의 놀이와 공연 상을 차려 방문객을 유인한다. 해남에서는 맛의 축제라는 미남축제를 개최하며 국토의 끝자락에서 맛의 진원지임을 세상에 발신한다. 영암에서는 월출산을
주말 제안
전고필
2025.10.24 00:00
-
점심을 먹고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가네이시 성터로 향했다. 오후 3시부터 시작할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은 이즈하라항구축제의 클라이막스와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쓰시마섬의 이즈하라항구에서 매년 8월 첫째주 토요일과 일요일날 진행하는 축제의 역사는 멀리 1964년으로 거슬러 간다. 지역 상공회가 주축이 되어 상공업의 활성화와 관광진흥을 위해 시작했다고 전한다. 주요 프로그램은 가장행렬, 불꽃놀이, 무대공연이 주를 이루는데, 1980년부터 조선통신사 가장 행렬을 진행했다고 전해준다. 그때는 이곳 쓰시마 섬 조선통신사행렬진흥회분들이 서울의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9.19 00:00
-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다로 도리이(일본 신사 입구에 세워진 기둥문. 신성한 공간과 일반 세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 역할을 한다)가 묻혀있는 와타즈미 신사였다. 일본인들에게 신사는 그들의 뿌리와 같은 것으로 신토라고 하는 일본 고유 종교의 사당 개념으로 신사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신사 마당에 두 개, 바다를 향한 곳에 하나 그리고 바닷속에 두 개의 도리이가 있는 풍경은 낯선 이국에 내가 와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20여년 전에 일본관광 포스터에 도리이에 기대선 여성의 스틸 컷이 마치 ‘그 섬에 가고 싶다’ 라는 자극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9.05 00:00
-
아마 2002년 겨울이었을 터다. 부산에서 일본 쓰시마 간 여객선이 운항되며 초청관광이 있었다. 운영사가 대아고속훼리였을 것이다. 부산에서 1박을 하고 아침 배로 들어간 대마도는 크게 낯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수선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찾았고, 부산이 보인다는 한국전망대에도 올랐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윤도현 밴드가 톱 반열에 올랐던 즈음이라서 한국말이 다소 서투른 가이드분이 이곳에서 매해 아리랑축제를 하는데, 윤도현씨가 출연료도 없이 찾아주는 것이 고맙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8.22 00:00
-
폭염으로 지상의 열기를 덥히던 6월 중순부터 땅은 고슬거리다 마침내 거북등처럼 갈라져 갔다. 지리한 장마가 찾아오던 6월과 7월은 어찌된 것인지 올해는 생략되고 말았다. 일상과 같았던 매해의 호우시절은 남부지방에 잠시만 얼굴 비추고, 중부권은 장마전선에 휩쌓인 날들이었다. 그러다 7월 중순에 들어서니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린다. 지난주 토요일 문을 열었던 기찬랜드는 내리는 비에 물놀이 손님이 드문드문 찾아올 뿐이다. 비님은 오시는데, 만족할만한 비는 아니고, 국지성 호우는 폭우로 변해 특정한 지역은 물바다를 만든다. 세상이 복잡해지듯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7.18 00:00
-
백운동 원림이 호남의 3대 원림으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실렸었더라면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졌을 터인데, 이곳은 패싱 되었었다. 그리고 이곳을 관광개발의 대상지로 삼으려던 강진군이 정민 교수로부터 자문을 받으면서 원림 고유의 가치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006년에서 2015년까지 백운동은 숨가쁘게 호명되었던 것이다. 담양의 소쇄원이 하서 김인후의 48영이라는 시를 통해 공감각적 배경과 실체 사이의 맥락을 잡을 수 있었고, 이를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있으며, 이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7.04 00:15
-
작년 강릉의 율곡연구원에 발표를 하러 갔었다. 오죽헌을 가지고 있는 강릉에서 담양 소쇄원의 체험 프로그램 사례가 궁금해 불렀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바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간을 조성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인문지리적 특징이 융합되며 공간이라는 한정된 구역이 장소로서의 의미망을 갖는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강진이나 해남, 영암 같은 곳은 역사 유적들이 산개한 곳이다. 여기에 강진을 특정하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남도 답사 1번지라고 명명했다. 산개한 유적이 마치 한덩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6.20 00:00
-
세상이 모두 연초록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푸른색으로 확연하게 물감칠을 한 듯하다. 자연의 손길은 멈추는 법이 없다. 그렇게 꽁꽁 얼었던 겨울도 이제는 잊혀져 버렸고, 눈을 이기고 드러났던 변산바람꽃의 자취도 치밀어 오는 풀들에게 모습을 감춰 버렸다.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오는 듯 반소매 차림의 행인들이 거리를 누비는 계절이다. 지난 5월 8일 해년마다 야생화를 탐하여 모이는 세 명이 이번에는 한 명을 더해 구례의 천은사에서 8시30분에 만났다. 이른 새벽 영암에서 출발하여 조금 일찍 천은사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원교 이광사가 물흐르듯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5.30 00:00
-
4월 24일 오후 차를 가지고 통영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전부터 있을 부산의 조선통신사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첫날 경유처를 그곳으로 정했다. 통영에는 문화현장에서 20여년을 한결같이 뵈었던 선배가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위한 1층 공간과 쉼의 공간이자 작업장을 겸한 2층짜리 건물에 깃들여 사시고 있다. 통영주택 [오! 늘]. 껌껌한 밤, 우리 일행은 여장을 풀기도 전에 목마름을 해소하러 바닷가로 나갔다.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의 야경은 늘 영광의 불빛과 한서린 물결이 공생한다. 우리가 머무는 처소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해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5.16 00:00
-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나 풀과 달라서 이리저리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다 귀소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지역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아예 멀어진 사람들에게는 일견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라는 말로 냉대하거나 무시한다. 간혹 그러지 않은 마을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다그러려니 하면서 입을 다문다. 지방 소멸의 시대, 생활인구의 증대에 사활을 건 지방정부와 유관기관은 어떻게든 지역과 연계를 맺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고육지책을 내어놓는다. 한데 거기에 굽은 소나무로부터 배제 대상이 바로 굽지 않아서 밖으로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4.18 00:00
-
겨울을 보냈던 유년시절의 기억속에는 저수지로부터 흘러내리는 얼어버린 고랑 가운데 뻘층이 있는 곳에 삽을 들이밀어 퍼내면 미꾸라지가 뭉쳐있다가 꿈틀거리며 나오는 것을 잡아 내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추워서 곁에 장작불도 피우며 삽질을 내내 하지만 미꾸라지를 한 마리라도 건져내면 그 후론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겨울의 미꾸라지 잡기는 아무나 못하는 것이지만 그곳 고읍리에서는 나와 십여살 위의 큰집 형 둘의 전매특허와 같은 것이었다. 김장을 하며 말려두었던 시래기를 넣어 한겨울에 먹는 추어탕은 그야말로 진미 그 자체였다. 그런 재미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3.21 00:00
-
3월이 오기전에 숙제같이 다가온 강박이 있었다. 거처하는 곳이 영산강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영암인터라 그 강에 압도 당한 탓인지 이곳이 탐진강의 발원지를 끼고 있는 지역이란 점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영산강의 발원지 용소 등을 마치 성지처럼 여기며 찾아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다녔더랬는데, 정작 내 곁에 있는 탐진강의 발원지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발원지를 장흥군과 경계에 있는 국사봉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3.07 00:00
-
전화로도 연락되지 않던 친구들은 간혹 SNS에 자신의 안부를 고백한다. 자랑질이 아니라 군중사이의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지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함에 미량의 미안함이 함께 한다. 오래전 통영에서 강제윤시인과 매화를 보며 통음을 할 때 낭독했던 시가 생각난다. 김명인 시인의 통화라는 시가 온몸에 짜릿하게 파고든 시간이었다. “광섬유의 신경올을 통과하는 말들이라면/ 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나는 화창한 봄날 뜰 한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텔레파시의 신호음 보낸다/ 세 번만 벨이 울리거든/ 마음의 기미를 듣고서 내게 응답해다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2.21 00:00
-
눈이 풍성하게 내리는 날이다. 전방위로 이동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눈은 풍년을 예감해주는 행운의 표징이었다. 사람과 사람, 도시와 도시간의 이동이 잦아지며 비와 안개와 눈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도 문명의 발달과 함께 효용의 가치가 달리 표현되는 시대를 걷고 있다. 눈이 내리면 나는 먼저 시인 백석을 떠올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여우난곬족, 흰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와 함께. 연이어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오탁번의 폭설, 김진섭의 백설부, 김광균의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2.07 00:00
-
[관련 기사] 돌 위에 새긴 염원…국장생과 고인돌을 찾아서 그렇게 4기의 고인돌은 그 옛적 선사인의 무덤에서 중세인들의 믿음의 공간으로 재 조정되고 한편으로는 부처를 찾아 가는 나그네들이 발품을 쉬어가는 장소의 역할로 변화 되었다가 이제는 길 한켠에 있는 듯 없는 듯 풍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갑사 가는 길로 눈을 돌려보니 이곳에도 돌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세운지가 오래되지 않은 장승은 한편으로는 기괴하고 또 한편으로는 출신지가 어디인지 궁금해지는 표정으로 삼거리중에 사찰로 가는 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장수 발자국과 향탄비와 국장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1.17 00:00
-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12월은 요란하게 시작되었고 그 달은 아직 내게 가시지 않았다. 내가 고대하던 그달은 12월 10일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었는데, 3일 밤 난데없는 비상계엄이란 말에 억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왔던 삶에서 다시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내 분야에서 묵묵히 견디며 한걸음씩 나아갔는데 모든 시간이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가는 허망한 순간을 마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이들의 대처는 망연자실한 나와는 달랐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내고, 총부리를 거두어내고
주말 제안
전고필
2025.01.03 00:00
-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월출산하. 간만에 후배가 찾아왔다. 물경 1년여 동안 문밖 출입을 자제했던 그가 안거를 해제하고 영암에서 해후의 장을 만든 것이다. 저녁을 털어서 우리는 통음을 했다. 그럼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20여년을 단짝처럼 지내다 연락두절의 시간이 1년이라 너무 그리웠던 터이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겨우 일어난 오전, 우리는 영암과 강진과 해남의 차밭을 찾아 나섰다. 이 계절의 차밭은 벌들이 마지막 밀원식물인 차꽃을 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날아오는 소리를 연출한다. 도갑사를 가진 영암에서는 선방의 스님들이 차를
주말 제안
전고필
2024.12.06 00:00
-
흔한 여행은 세차례의 절차를 거친다. 여행의 준비과정에서 설레임으로 시작하는 과정, 두 번째는 현실을 벗어나 여행자가 되어 마주하는 과정, 마지막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것저것을 정리하며 회상하는 과정까지다. 하지만 여행과 관련한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르다. 준비도 하지 않고 가서 그냥 일상적인 순간까지도 마치 여행인 것처럼 말을 늘어놓는다. 아마도 삶이 여행이라고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필기구가 없어도, 카메라가 없어도 그들이 뿜어내는 말은 여행기가 되어 읽는 이들을 혼돈하게 한다. 며칠 전의 필자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
주말 제안
전고필
2024.11.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