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쓰시마 출장 3일간의 기록

한국전망소라 명명한 전망대.
한국전망소라 명명한 전망대.

 아마 2002년 겨울이었을 터다. 부산에서 일본 쓰시마 간 여객선이 운항되며 초청관광이 있었다. 운영사가 대아고속훼리였을 것이다. 부산에서 1박을 하고 아침 배로 들어간 대마도는 크게 낯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수선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찾았고, 부산이 보인다는 한국전망대에도 올랐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윤도현 밴드가 톱 반열에 올랐던 즈음이라서 한국말이 다소 서투른 가이드분이 이곳에서 매해 아리랑축제를 하는데, 윤도현씨가 출연료도 없이 찾아주는 것이 고맙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그때는 아직 여행자를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던 쓰시마사람들의 호의가 생생했다. 그리고 이번 8월 24년만에 다시 쓰시마를 찾았다. 상호 우호협력을 맺은 부산문화재단에서 쓰시마의 이즈하라항구축제에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위해 초대되어 가는데, 내가 속한 영암문화관광재단도 함께하자는 초청에서 시작되었다. 부산문화재단은 쓰시마섬 외에도 조선통신사가 일본과 내왕했던 12번의 사행길에서 접하게 된 도시와 연지연락사무소라는 조직을 통해 끈끈하게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나로서는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영암에서 일하고 있기에 이런 국가간 연대와 민간교류 부분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가득한 셈이었다.

부산 초량시장.
부산 초량시장.

 영암에서 시작된 여정과 부산에서의 전야

 8월 1일 오후 영암에서 출발하여 부산역앞 토요꼬인에 여장을 풀었다. 인근하여 초량시장에서 부산문화재단 대표님을 비롯한 담당팀장과 과장을 만나 내일부터 이어질 공식행사에 관한 일정을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머물러 본 경험이 있는 호텔은 정말 미니멀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쓰시마에서도 토요꼬인 이즈하라에서 묵는다고 하니 마치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었다. 24년전 쓰시마에서 냉온방 장치를 잘못 조작해서 감기에 걸렸던 악몽이 있었던 터라 함께 간 축제도시팀장에게 조작법을 다시 배웠다. 아무리 디지털화 되려 해도 역시 난 아날로그형 인간이 분명했다. 다음날 새벽 부산국제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간단한 출국수속을 하고 환전은행으로 찾았다. 8시 정각에 문을 여는 곳이라 한참을 기다려 20만 원을 엔화로 바꿨다. 그리고 출국라운지에서 서성이다 면세점에 들렸다.

미우다 해수욕장 전경.
미우다 해수욕장 전경.

 면세점에서의 반가운 재회 ‘레미 마르뗑’

 작은 사이즈의 아담한 면세점에는 부산소재 중소기업의 상품들이 많았다. 제주공항의 면세점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중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단연 술이었다. 이 또한 일본 오키나와 여행에서 만난 것이었는데 “레미 마르뗑”이었다. 59달러로 찍혀 있으니 6만 원 정도의 가격, 요즘 말로 득템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양주 종류는 두병까지 인입이 가능하니 두병을 모두 챙겼다. 고국에 들어와 좋은 사람들과 맛나게 먹을 생각을 하니 배가 절로 불러왔다. 수중익선이라고 하는 쓰시마링크호에 올랐다. 2층 선실에 앉으니 자리가 편안했다. 안전안내 방송과 선내 면세점 홍보 방송이 나왔는데, 이제 면세점은 둘러 볼 생각이 없었다. 잠을 청하고 불과 한시간 40여 분만에 쓰시마의 히타카츠 항에 도착했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차에 탑승했다. 쓰시마시청 관광부서 담당자가 직접 우리 일행과 모든 여정을 수행한다고 하신다. 부산재단의 임직원들은 이미 너무 친밀한 사이라 덩달아 편안해졌다. 그렇게 출발한 쓰시마에서 우리가 처음 마주한 것은 인적이 드문 해수욕장이었다. 미우다해수욕장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해수욕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
해수욕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

 백사장의 길이가 길고 내부로 수심이 얕아서 어린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너무 적격해 보였다. 배후에 휴게공간과 취사공간, 그늘막, 샤워시설을 비롯해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데다 온천장을 갖춘 토요꼬인 호텔이 함께 있어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했다. 한국의 해수욕장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마치 제주의 함덕해수욕장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로 우리와 비슷했다. 해변을 거닐다 보니 바닷속에서 노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대부분 한국어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자연경관의 유사성이 혼동을 불러왔다. 뜨거운 햇볕을 뒤로 하고 다시 차에 탑승했다.

부산이 보이길 바라며..
부산이 보이길 바라며..

 한국전망소에서 느낀 거리감과 가까움

 다음 목표는 한국전망소라 하는 전망대였다. 전에 왔을때와 약간 달라보여 여쭤보니 코로나 기간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와이파이가 잡힌다고 하고, 좋은 날씨에는 부산이 보인다고 했다. 그 얘기는 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쌍안경에 눈을 들이대고 부산을 찾으러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데, 모두들 적격한 날씨가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화창한데 대한해협에 운무라도 껴 있는 것인지 부산은 안보인다. 대신에 전망대 전시관에 쓰시마에 관한 여러 안내그림들이 나를 반긴다. 쓰시마의 자연과 역사, 대표하는 관광지의 모습등이 눈에 잘 보이도록 전시되어 있다.

조선역관순난위령비.
조선역관순난위령비.

 그렇게 다시 전망대를 나오니 조선역관이 풍랑을 맞아 섬에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안타까워 하는 위령비가 눈에 띤다. 1703년 부산항을 출발한 역관 108명이 일본인 4명과 함께 순난을 당한 것이다. 이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08개의 돌로 만든 비라고 한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한편 더 이해가 되었다. 3·1절과 광복절 무렵이면 언제고 상기되는 일제에 병탄된 시절의 역사,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난한 독립지사와 국민들의 항쟁. 그리고 상호 평화와 교린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움이 있었으리라 여겨졌다. 그렇게 만감이 교차한 가운데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문득 눈에 띈 쫀득쫀득 붕어빵을 파는 푸드트럭의 글씨가 웃음이 일게 한다. 배가 고팠으면 당장 뛰어갈 것인데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니 그냥 패스했다.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왕인박사 현창비와 문화적 해석의 간극

 이제 우리 일행은 백제국 왕인박사 현창비 앞에 멈춰섰다. 24년전에도 들렸던 와니우라라고 하는 항구의 초입인데 그때는 보지 못했었다. 현창비의 뒤로 가니 2007년 5월 27일 이 비를 건립했다고 새겨져 있다. 옆에는 검은 오석에 “일본의 고사기와 서기에 백제국 왕인박사가 일본의 초청으로 천자문 1권과 논어 열권을 가지고와 한문과 학술을 전하여 학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라는 안내글이 써 있다. 한국에서 심지어 영암에서도 왕인이 실존한 것인지에 대한 이론들이 분분한데 일본의 곳곳, 그중에서 쓰시마에서도 이렇게 왕인을 현존 인물로 상징하고 있음이 우리와 다른 세계관을 접하는 듯 싶어졌다. 심지어 이곳의 지명 또한 왕인이 온 항구라고 해서 와니우라라고 부르고 있다 하니 이 때문에 여기를 찾았음에도 마음이 오락가락해졌다. 왕인박사의 유적지인 성기동을 가지고 있고, 그가 공부했던 공간 문산재와 양사재, 책굴, 왕인석상 등을 보유한 영암이다. 그런데 그이에 대한 문자 기록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여진 것이 없다. 하여 제기된 문제가 도선국사의 위업에 덮어 쓴 것 아니냐는 의문들이 늘 생생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왕인과 도선의 시대는 다르며 마한의 중심지로서 존재했던 영암이기에 국제교류의 중심지로서 선진문물의 수용과 발전에 어느 곳보다 빠르게 나아갔음으로 왕인박사 같은 인물은 배태하고도 남은 곳이라는 문화사적 업적과 지정학적 위치의 입증설도 만만치 않게 길항하고 있었다.

선어가 있는 점심.
선어가 있는 점심.

 최근 정은영작가가 쓴 “마한여행기”를 보면 왕인박사에 관한 기록이 이덕무의 글을 비롯해 더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볼 때 왕인박사에 관한 연구는 더욱 다양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함을 영암에 살며 일하는 사람으로서 느낄 수 밖에 없는 현창비와의 조우였다. 이제 점심시간 우리는 다시 히타카츠의 식당으로 갔다. 생선 정식. 참 오랜만에 선어를 먹어보는 자리였다. 소담한 식당이지만 예약된 손님만 받으며 정갈하고 신선한 상차림이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회를 주로 먹는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회를 숙성하여 먹는 선어가 주를 이룬다. 그런 일본의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 가끔은 있는데 예전에도 언급했던 대구의 종로초밥과 같은 곳이 그런 식당이다.

다음편에 만날 도리이가 있는 풍경.
다음편에 만날 도리이가 있는 풍경.

 기술문명과 정(情)의 거리

 광주와 전남 권역에서는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농업박물관에서 강의를 듣다가 강사께서 돌발적으로 질문한 내용이 생각났다. “왜 어촌마을의 생선 인심이 예전과 달라졌을까요?”라는 물음이었다. 고개를 갸웃 하는데, 강사께서 웃으면서 “예전에는 물고기를 잡으면 적당히 먹고 나눠 먹거나 건조했는데, 이제는 냉장 기술이 발달하며 나누지 않고 냉동처리 되니 생선인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라는 답이었다. 아! 기술문명이 사람 사이를 이렇게 가르는구나 싶어져 무릎을 치던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이제 본격적인 쓰시마의 여정에 다시 오른다. 이번에는 우리와 다른 종교시설인 신사를 찾아간다.(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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