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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왕이 왕국을 물려주겠다면서 세 딸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달라고 한다. 하늘의 달이라도 별이라도 따줄 듯한 충성 경쟁이 예견된 일.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얼개다. “(…) 가장 값지다거나 희귀한 것 이상으로(…) 모든 한계를 다 넘어 전하를 사랑하옵니다.” 첫째 딸 고너릴의 아부는 통했다. 기름진 산림과 풍요로운 들판이 그의 몫이 됐다. 둘째 딸 리간도 못지 않았다. “인간사 모든 감각이 주는 기쁨을 뒤로하고 오로지 전하의 사랑 속에서만 행복해진다”고 속삭이니, 리어왕이 안 넘어갈 재간이 없다. 왕이 누구보다 아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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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엔 ‘행정의 달인’이라는 시장이 몇몇 있었다. 강운태 전 시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 걸쳐 두 차례 장관을 지냈고 국회의원 재선 이력이니, 유권자들이 광주 발전에 건 기대감이 컸다. 그 시절 크고 굵직한 사업들이 진행됐지만 눈에 띄지 않아 흐릿하다. 오히려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오명을 남긴 ‘갬코’ 사태가 더 각인돼 있다. ‘행정의 달인’이란 별칭은 칭송이기도 하고, 반대이기도 했다. 재임 당시 강 시장은 금요일마다 순회하며 주민들과 대화 마당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상당수 민원을 속속 해결해줬다. ‘달인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7.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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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kangaroo in Austria.’ 동유럽 빈 여행 중 ‘오스트리아엔 캥거루가 없다’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품들이 즐비해 눈길이 꽂혔다.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유럽의 ‘오스트리아’를 헷갈리는 관광객이 그만큼 많았던 모양이다. 화가 날 법한 현실을 반전시켜 아예 상품화해 버렸다. 우리에게 ‘없음’을 ‘자산’으로 만든 신박함이 상술보다 지혜로 여겨져 구매 욕구를 더 키웠다. ‘있음’을 확인하는 건 쉬우나 ‘없음’은 실재화가 어렵다. 증명 대신 활용, 반전의 스킬을 문학에서도 발견한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쓴 정재찬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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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주머니가 악마와 성관계를 맺고 아이를 잡아먹고, 병을 퍼뜨린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가 10만 명, 화형 등 실제 목숨을 잃은 이는 5만 명에 이르렀다. 1400년~1775년 사이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벌어진 마녀재판 이야기다. 교회 시대, 마녀재판은 한 사람의 영혼의 죄를 단죄하는, 나름 신성한 의식이어서 법적 절차가 명확했고 기록도 철저히 남겼다. 너무 위중하고 밝혀내기 어려우므로 ‘예외적 범죄’로 취급해 고문이 허용됐다는 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고문을 못 견뎌 스스로 마녀라고 자백하고,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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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 서광주IC로 진입할 때 앞서가던 트럭에 소 1마리가 실려있는 걸 봤다. 개방형 철제 케이지에 갇혀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체육중 삼거리에서 진행 방향이 갈렸다. 트럭이 향한 곳은 북구 연제동 쪽. 순간 그 지역에 있는 광주지역 최대 도축장이 떠올랐다. 아마도, 소에겐 이 세상 마지막 여행길이었으리라. 세상, 고기는 잘도 먹더니만 무슨 가증스러운 측은지심이냐고 힐난받을 수 있겠다. 오래 전 썼던 기사가 떠올랐다. 북구청이 유동 300m 구간을 ‘오리요리 거리’로 명명하고 건립한 상징 조형물 관련이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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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버겁다. 뉴스가 무겁다. 또한 무섭다. 삶의 무게 만큼이다. 그럼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분노하고, 지쳐 외면하고, 그리곤 불안해한다. 다시, 뉴스를 찾는다. ‘실시간 뉴스 중독’이라는 요즘 세상의 굴레다. 신문이 매체의 중심일 때 뉴스의 유통기한은 하루였다. 다음날 새로운 뉴스가 발행될 때까지. 인터넷 세상인 지금, 뉴스는 휘발성이다. 분초단위로 새로운 소식이 업데이트 되니, 분노와 불안 때론 환희의 기제가 시시각각이다. 인간 삶의 축적이 역사일진대, 현대사회 그 저본(底本)이 될 매일매일의 ‘사초(史草)’가 무엇일까 묻는다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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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1월 5일,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설렘 가득하게 맞이할 날이었다. 독립협회와 고종 황제의 합의로 중추원 의관(의원)을 선출키로 한 날, 왕정-황제국으로 이어진 대한제국에 ‘의회’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선출될 의원은 50명으로 독립협회 25명, 황제가 25명을 추천키로 했다. 왕정에서 권력을 분산해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황제가 이를 반겼을리는 만무한 일. 수구파들과 합세한 반격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해온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는 익명서에 기반해 의관 선출 전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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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무장한 전도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프랑스혁명을 공포정치로 ‘탈선’시킨 로베스피에르(1758~ 1794년)의 말로 기록된 역사다.(유럽인 이야기·주경철 저)16세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서 설파했던 ‘무장한 예언자’론과는 결을 달리하는 인식이다.‘왕정 타파’ ‘입헌 민주주의’…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이 유럽 확산이라는 기로에 선 시기, 로베스피에르의 예의 발언이 나왔다.유럽의 군주들은 이 불온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태세였고, 프랑스 혁명 정부내에선 전쟁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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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공휴일 프로야구 관람을 위해 야심 차게 도전했던 두 번의 기회가 모두 무산됐다. 어렵사리 티케팅에 성공했지만 하늘에 덕을 쌓지 못함인가. 번번이 우취(우천취소)에 좌절했다. 타이거즈가 워낙 잘 나가니, 하늘의 별이 돼버린 입장권 예매는 필자만의 사정이 아님을 안다. 경기 일주일 전 열리는 온라인 예매 창에 광속 클릭, 또는 친구·가족 또는 사돈에 팔촌까지 동원해도 쉽지 않더라는 게 직간접 경험담이다. “TV 중계로 보는 게 훨씬 실속 있잖아! 다시 보기도 되고 상세한 해설까지….” 합리화해보지만 별로 위안이 되진 않더라.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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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 오는 날 밤, 교사인 친구 A의 발걸음이 자꾸 뒤처진다. 모임을 마치고 함께 걸어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가만 보니 보도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를 열심히 옮기는 중이다. 그가 맨손으로 집어 들어 가로수 아래 흙으로 데려간 것은 지렁이들이다. 보도로 기어 나온 이들이 보행자들에게 밟혀 죽을까 하는 측은지심이었으리라. 요행히 이 밤 구둣발 비명횡사를 피한다 해도 다음 날 해가 떴을 때도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지 못하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생태적 습성을 아는 이의 절박한 구조 작업이었다. 피부 호흡을 하는 지렁이는 비가 와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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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잠 못 이루며 뒤척이다 수면 장애의 원인을 추적해 본다. 어렵지 않게 짚이는 건 ‘검은 음료’, 그것이다. 평상시보다 더 많이 마셨더라 싶더라니. 커피의 역사를 따져보면 이같은 추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으로 퍼져 대중화된 커피는 ‘잠을 쫓는다’는 이같은 특성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시면 쉽게 흥분되고, 잠들기 어려워진다. 식욕도 사라진다.’ 어찌 보면 부정적인 효능이 분명한데, 이를 역으로 활용해 즐겨 마신 이들이 이슬람 수피교 수도사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세계사를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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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는 어떤 면에서 위대한가? 소설 ‘위대한 개츠비’(원제:The Great Gatsby) 독자에겐 주인공에 대한 이 수식어가 해묵은 논쟁 중 하나다. 원문에 ‘Great’ 를 쓴 출판사의 의도(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생각이 달랐다는데)는 물론, 번역에 대한 ‘사실 충실성’(Factfulness)이 분명치 않아서일테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이 물욕과 정욕에 찌든 인물인데, 개츠비도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류로 보인 탓이다.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과정에 부정한 기운이 감지되지만, 가난 때문에 붙잡지 못했던 애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4.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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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의미, 가치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미 지식의 보고가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읽는 텍스트 대신 보는 콘텐츠로 대체된 흐름이 강고하니 무슨 반전이 있겠나? 싶었는데 웬걸 이곳저곳서 책의 향연이다. 출판기념회 소식이 수시로 이어지니, 다시 책의 시대인가? 기대했다가도 “물정 모른다”는 면박에 뒤통수가 따끔해 헛웃음이 절로다. 책은 수단일 뿐,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정치(인)의 미끼뿐인 것을… 책은 종이를 원료로 출판이란 기술이 결합한 산물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책의 기본인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입지를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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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슴 뛰는 일을 하게 됐다’는 어떤 이와 같은 현장에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았다.‘나도 그렇다’는 긍정의 조아림이었을 터. 필자도 그랬으니까.그 일이 이뤄질지,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지만 시작 자체만으로도 설렘 가득했다.목표를 설정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그 ‘거사’를 함께 도모했으니 ‘역사적 기록 남겨야 하지 않겠냐’며 단체 사진을 찍었더랬다.‘그 사진에 빠지면 평생 후회할 것 같노라’며 모임 끝나가는 순간에 종종걸음 들어선 이가 ‘그날’을 더 각인시켰다. 몇몇의 아이디어로 ‘백만평 광주숲’ 이야기가 회자되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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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화들짝 놀라 내딛던 오른발을 가까스로 비켜낸다. 땅에 드러누운 가냘픈 육신이 눈에 밟혔음이니, 내 무게 중심을 이동케 한 ‘뉴런(신경세포)’에 감사하다. 망사처럼 투명하고, 유려하고, 길쭉하니 날렵한 두 날개 딱 달라붙어 정갈하다. 오물오물 여섯 다리 ㄱ자로 모아 몸통에 붙었으니, 마치 염을 한 망자처럼 처연하다. 한여름 그들에겐 천국이었을 땡볕 속, 자유롭게 날던 세상과 어찌 작별했을까. 백제가 무너지듯 한순간에 낙화하는 동백을 닮고 싶었음인가.(김훈 자전거여행) 날다가 그대로 고꾸라졌으리. 운명처럼…. 마지막 비행이었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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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참여하는 사적 모임 중에 ‘광백모’가 있다. 놀리기 쉬운 딱 그 단어, ‘백수’ 아니고 무려 ‘백 년’이다. 그렇다. ‘광주 백 년을 준비하는 모임’의 줄임말이다. 십수 년 전이다. 당시 30·40대가 주축으로 각 분야 10여 명이 모임에 참여했으니 ‘광주 백 년’에 대한 성찰 내력이 간단치 않다.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정도여서 창대했던 시작이 꿈만 같긴하다. 회원들 사이 ‘이름값이 너무 무겁다’는 푸념이 있었다.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댄 시간이 길었지 싶다. 갑자기 ‘광백모’를 호출한 건, 최근 광주에서 이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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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차장에 떨어져 있던 1000원짜리 지폐. ‘칠칠치 못하게 누가 흘리고 다닌담.’ 혀를 끌끌 찬 뒤 ‘어떻게든 해보자’며 주워 들긴 했는데. 주인이 누군지 알아야 돌려주지. 돌려준다고 좋아나 할까? 여러 가지 생각에 근처 차량에 올려놓고 돌아서는데 왠지 끌리는 느낌이…. 가만 있자, 1000원짜리 실물 영접이 얼마만이냐. 갑자기 눈 마주친 화폐 속 퇴계 선생도 여러웠든지 얼굴이 파랗게 상기돼 있다. 1500원짜리 커피도 카드로, 페이로 계산이 자연스러운 시대다. 택시 운전사 잔돈 심려 끼치지 않으려고 천 원짜리 꼬박꼬박 챙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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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 성종(993년)때 거란이 침입했다. 땅을 떼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이른바 ‘할지론’은 오판이었다. 서희 등 ‘국풍파’가 나서 탐색해보니 거란의 의중은 땅이 아니었다. 송과의 관계 단절, 즉 그들과 관계 맺음을 원했다. 중원(북송) 정벌에 나설 참인데, 후방의 고려가 자신들을 칠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도 니네랑 교류하고 싶어. 그러니 중간에 버티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 줄래.” 통했다. 거란의 힘을 빌려 여진족을 몰아내고, 고려는 강동 6주로 진출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장된 계기. 칼과 창을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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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미국 독립혁명 전후로 본격화한 영국에서의 1차 산업혁명은 동력의 기계화가 견인차였다. 인간의 손과 근육에 의존했던 동력이 증기기관으로 대체된 게 이 즈음이다. 수직 운동이란 한계에 물레방아 만큼에도 힘이 못미쳤던 증기기관은 이 시기 와트에 의해 접목된 콘덴싱 기술로 거대한 힘을 장착하게 된다. ‘500 마력’쯤 이르고 보니, 공장을 세우고 공정을 자동화해 그야말로 산업 혁명을 이끌었다. 이어 독일·미국으로 전파된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가 결합해 한층 더 큰 동력을 확보했다. 20세기 들어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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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이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유대인 게토(유대인 거주지)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수행원들도 폴란드 정부 누구도 예상 못 했던 행동. 독일을 대표해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한 역사적인 장면이 탄생한 순간이다. 2차대전을 촉발한 독일로부터 직접 침략당한 폴란드의 가해국에 대한 감정은, 식민지 지배 일본에 대한 한국의 그것처럼 원한이 사무친 지 오래. 이날 브란트가 꿇은 무릎은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행동
편집국에서
채정희 기자
2023.03.0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