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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立冬)을 지나 소설(小雪)로 가는 늦가을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 이 계절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문학 서적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선택할 것이다. 이 책은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고아하고 격조 있는 문체의 훌륭한 인문학 서적이다. 물론 번역가의 능력에 힘입은 부분도 크지만 본디 서경식의 일본어 원문이 깔끔하고 정갈한 덕분이다. 번역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듯 아무리 뛰어난 번역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원문이 졸문이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서경식은 빼어난 문장가다
삶의 자세
강은영
2025.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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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아마테라스’라는 일본 신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아마테라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를 즐겨본 매니아들 사이에서나 주인공 우치하 일족이 사용하는 초강력 술법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 국민들조차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지난 7월 김건희 특검팀이 건진법사의 법당을 압수수색하던 중 2층 거실과 연결된 비밀의 방에서 아마테라스상을 모신 신당을 발견(중앙일보 7월 16일 기사 참조)한 뒤 벌어진 현상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건진법사가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자 신도(神道)의 주신으로 일컫는 아마테라스
삶의 자세
강은영
202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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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은 세계 각지의 신화에 등장한다. 탈피를 반복하는 특징에서 생명력과 불사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맹독을 가지고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조몬시대(신석기시대)의 토기에 뱀을 형상화한 모양이 다수 보인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뱀은 고대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동물이다. 야요이시대(청동기·철기시대)에 대륙에서 전해진 벼농사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농지와 수로 등에서 자주 목격되는 뱀을 수신(水神), 혹은 수신의 사자로 여겨 신봉했다. 곡식은 물이
삶의 자세
강은영
2025.08.0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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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여자·돌·바람이 많아서 삼다도라 불린다. 하지만 이 별칭은 제주도의 표면적인 부분만 나타낼 뿐이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신과 신화, 신당이 많은 섬이다. 신이 얼마나 많은지 만 8000의 신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뱀 신과 뱀 신화가 단연 원톱이다. 기후가 고온다습하여 육지보다 많은 뱀이 서식하지만, 뱀이 많다고 뱀을 신앙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뱀 신화는 오랜 시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면서 많은 변형을 겪는데, 그 원형에 가까운 신화가 당신화(堂神話)인 본풀이다. 제주도는 마을 단위로 다양한 마을신화가 있고, 마을
삶의 자세
강은영
202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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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제주도에는 꽃 소식이 한창이다. 동백과 유채 등 봄꽃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제주도가 80년 전에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가 될 뻔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의 격전지였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비대 10만 명이 전멸하고 민간인도 약 10만 명이 희생됐다. 미군의 사상자도 약 5만 명에 달했다. 미군이 한 지역의 전투에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해방될 무렵 제주도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었는데, 만일 마지막 격전지가 오키나와에서 제주로 바뀌었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삶의 자세
강은영
2025.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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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세밑 풍경이 어수선하다. 2024년은 국내 안팎으로 유난히 변화가 많은 해였다. 개인적으로 올 한 해는 참으로 바쁜 해였다. 몇 편의 탐라 관련 글 덕분에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기회가 많았다. 인생 오십 줄에 들어서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뿐 아니라 학문과의 만남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국사를 공부하다 일본사로 전향한 것도, 제주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쓰게 된 것도 모두가 인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많은 인연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한 인연은 좀처럼 조우하기 어렵다.
삶의 자세
강은영
2025.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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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입동이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교토의 대표적 향토 요리인 유토후(湯豆腐)의 계절이 돌아왔다. 유토후는 본래 사찰에서 즐기는 정진요리(精進料理)의 하나로, 교토 난젠지(南禪寺) 부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기 냄비에 물과 다시마·두부를 넣고 끓이다가 적당하게 익으면 두부를 꺼내어 다레(양념장)에 찍어 먹는 요리이다. 비교적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다레의 바리에이션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다레 맛으로 먹는다고는 하지만 역시 두부가 맛있어야 한다. 교토는 예로부터 물이 좋아 두부 요리가 발달했고, 유토후라는 교토
삶의 자세
강은영
2024.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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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유의 7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 열도에는 1603년 에도 막부의 개창으로 평화와 질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607년 3월 3일, 정사 여우길(○祐吉)이 이끄는 조선통신사 476명이 쓰시마 후추(對馬府中)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사행은 선린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양국의 서로 다른 학문, 예술, 문화 등을 교류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문화 마찰이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1764년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을 축하하는 제11차
삶의 자세
강은영
2024.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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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8월은 살갗을 찌르는 강한 햇빛과 체내의 모든 땀구멍을 열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무더위와의 싸움이다. 또 8월은 원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달이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이 해방된 달이다. 일본 역사를 연구하면서 드는 생각은 일본이 참 운이 좋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그 사례를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서 찾아본다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극비리에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이 결정되자, 미국은 전후 극동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패색이 짙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였다. 이는 전범국가인 일본이 피해자로 변신할 기회
삶의 자세
강은영
2024.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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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란 사전적으로 ‘지나간 일이나 삶, 그리고 지나간 때’를 의미하지만, 일상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좀 더 부정적이다. 모든 인간은 과거를 가지고 있고, 과거의 영향을 받으며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인 오늘은 또다시 과거가 되듯 과거라는 주문(呪文)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힘은 절대적이고 엄청난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과거는 어떤 이에게 절대적인 힘으로 현재와 미래를 구속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무력하고 무해한 한편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읽다 말다를 거
삶의 자세
강은영
2024.07.0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