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일본행 정조문 선생의 역사혼 간직
교토의 8월은 살갗을 찌르는 강한 햇빛과 체내의 모든 땀구멍을 열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무더위와의 싸움이다. 또 8월은 원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달이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이 해방된 달이다.
일본 역사를 연구하면서 드는 생각은 일본이 참 운이 좋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그 사례를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서 찾아본다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극비리에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이 결정되자, 미국은 전후 극동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패색이 짙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였다. 이는 전범국가인 일본이 피해자로 변신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36년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일본을 한 달 내내 지켜보는 것은 내심 불편한 일이다. 하물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 이 시대의 경계인으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교토(京都) 북쪽의 가미가모진자(上賀茂神社) 인근에 자리 잡은 고려미술관은 재일조선인 실업가인 정조문 선생이 1988년에 설립한, 일본에서 유일하게 한국 미술품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곳이다. 일본 내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꽤 유명한 미술관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고려미술관과의 인연은 2004년 봄,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의 고정용 교수님 소개로 정조문 선생의 장서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을 접하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유학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식민지배·냉전체제가 만들어낸 경계인
재일조선인을 흔히들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이 호칭의 의미는 ‘일본인이 아닌데 일본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올바른 호칭은 ‘재일조선인’이지만, ‘조선인’이라는 말이 불편하기 때문에 ‘조선인’을 빼고 사용하는 것이다.
‘조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인을 멸시하는 차별적 어휘가 되어 버렸고,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이 건국되어 북한을 지칭하게 되면서 이 호칭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라는 명확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누구이고, 왜 일본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고, 전후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이 만들어 낸 역사의 경계인이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계속 증가하여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했을 때 일본 ‘내지’에는 약 230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 증산계획으로 조선의 농촌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온 이들이었고, 어떤 이는 일본 내지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모집되어 온 이들이었으며, 또 어떤 이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이들이었다.
패전 후 강제 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귀국하였는데에 반하여 일본 잔류를 결심한 이들은 강제동원기인 1940년대 이전에 이주하여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을 잡은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 정부는 ‘구 식민지 사람들이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 일본 국적을 유지한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947년에 ‘외국인 등록령’을 발표하면서 조선인은 외국인으로 간주 되었고, 국적란에 국가명이 아닌 임시적 기호인 ‘조선’을 기입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 정부는 구 식민지 출신자는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60만 명의 재일조선인은 분단되기 이전의 민족 명칭인 ‘조선’이라는 기호를 국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조선인은 남과 북 양쪽에서 잊힌 존재였다. 물론 1959년부터 1980년까지 북한의 귀국 사업으로 약 10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북송선을 탔지만, 이는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을 북한에 떠넘기는 것일 뿐이었다.
현재 재일조선인의 80% 정도가 무국적 상태인 ‘조선’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나머지 20%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무국적 상태이다. 여기에서 ‘조선’은 북조선(북한) 국적이 아니라 한반도 출신임을 나타내는 기호라는 사실이다. 즉 재일조선인은 국가가 없는 난민이고, 그 책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재일 조선인 90% 전라도 등 남부 출신
정조문 선생은 1918년 동래정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예천군 우망리에서 태어나 상해 임정 활동 경력을 가진 부친을 따라 특고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1925년 교토로 이주하였다. 이른바 선생은 재일조선인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재일조선인은 90%가 한반도 남부 출신들로 경상남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출신자였다.
오사카에는 가장 많은 조선인이 살았는데 제주도민 5만을 포함한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후쿠오카와 효고, 교토, 야마구치, 아이치는 경남 출신이 많았으며, 도쿄는 전남, 경남, 경북 출신이 골고루 살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쏠림 현상은 연고에 의한 것으로 정조문 선생의 부친 또한 7촌 아저씨가 살고 있는 교토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재일조선인 1세대가 대체로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듯, 선생도 상급 학교 진학은 꿈을 꿀 수도 없었으며, 공사장과 하역 작업장을 전전하는 삶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생은 친구들과 함께 히가시야마산조(東山三條)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하였고, 1955년 히가시야마산조 부근의 골동품점 ‘야나기(柳)’에서 조선백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부터 파친코와 요식업에서 번 돈으로 일본에 반출된 고국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조선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세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학술잡지를 발행하였다.
수집한 미술품은 통일된 조국에 선물로 가져가고자 하였지만, 통일은 요원해 보이고 병은 깊어지자, 일본에서 통일된 미술관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고려미술관이다. 교토에 가면 식민지 지배와 분단 체제의 피해자인 재일조선인 1세가 만든 남쪽도 북쪽도 하나가 되는 미술관이 있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