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층간소음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이웃 간의 정이나 만남 따위가 쉽지 않은 시대다. 서로 각자의 집 안에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웃 주민들이 얼굴 볼 기회는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인사도 하지 않는 흘끔거리는 시선 정도가 끝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일상의 통로가 되어줄 것은 고장난 엘리베이터 정도일 것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야엘 프랑켈이 그리고 쓴 (2025, 후즈갓마이테일)는 만남의 장이 되는 장소로서의 엘리베이터를 그려낸다. ‘나’는 강아지 로코와
동네책방
호수
2025.11.24 00:00
-
삶도, 사랑도, 이야기도, 책도, 시작하면 끝난다. 끝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과도 같은데,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왜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지, 왜 이야기가 완결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다정하고 상냥하게 풀어낸 책이 바로 ‘끝의 아름다움’(2021, 소원나무)이다. 알프레도 코렐라가 글을 쓰고 호르헤 곤살레스가 그림을 그린 이 책은 어제 막 100살이 된 거북이 ‘니나’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여행을 해온
동네책방
호수
2025.10.27 00:00
-
현대사회, 특히 한국의 현대사회는 손해와 이익에 대한 계산이 끝없이 계속되는 세계다. 감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사회에 소속돼 있기 위해, 덜 힘들기 위해서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을 강구한다. 하지만 과연 손해 보지 않고 살아도 되는 걸까? 손해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영원히 나의 손익이 더하기의 영역으로 기울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말인가? 짧은 글밥과 크레파스로 뭉개 그린 것 같은 그림은 따스함을 가슴 한가운데에 톡 떨어뜨린다. 이나래 작가의 ‘
동네책방
호수
2025.10.13 00:00
-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완벽히 내 의견만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시간에 쫓겨 별 수 없이 선택하기도 하고, 차악을 선택하기도 하고, 우연에 이끌려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모든 선택은 내가 내린 것이기 때문에 책임지고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 책임은 단순히 나라는 사람의 안위에만 국한되지 않기도 한다. 친구로, 가족으로, 동반자로 선택한 이들에게까지 책임의 영역은 넓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고 자라 한국으로 건너와 활동
동네책방
호수
2025.09.22 00:00
-
9월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온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가을 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을은 한 해의 끝을 조심스럽게 알리는 시기이며, 올해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돌아보아야만 하는 시기이다. 그리하여 가을은 별 수 없는 슬픔이 인간을 파고드는 계절이다. 낸시 화이트 사이드가 글을 쓰고 타마라 엘리스 스미스가 그림을 그린 (2025, 반출판사)는 이렇듯 우리에게 파고드는 슬픔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의 그림은 따뜻하다.
동네책방
호수
2025.09.08 00:00
-
우리가 여름마다 듣게 되는 매미들의 합창은 장장 칠 년에 걸쳐서 완성된 노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칠 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길어서 새삼스럽게 되새길 때마다 혀를 내두를 뿐이지 정말로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자들은 손에 꼽을 것이다. 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미는 시간을 포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오랜 기다림이다. 매 순간의 열렬한 기다림. 이 열렬함에 대해 알고 있는 생명은 그것을 존중하고 돕는다. 박완서 작가의 글에 김세현 작가가 그림을 그린 ‘7년 동안의 잠’(2015, 작가정신)은 개
동네책방
호수
2025.08.25 00:00
-
‘페르소나’란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사회적 요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표출하는 공적인 얼굴을 뜻한다. 특히,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이 ‘페르소나’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진정한 나를 숨기고 싶을 때의 방패가 되어주기도 하고, 사회적인 상황에서 내가 아닌 무엇-스럽게 굴어야 할 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페르소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또 해체되기도 한다. 권자경 작가가 글을 쓰고 하완 작가가 그림을 그린 ‘가시
동네책방
호수
2025.08.11 00:00
-
어떤 우화들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토끼와 거북이 또한 그러한 우화 중 하나다. 느리지만 꾸준히, 열심히 목표에 임하는 거북이와 게으른 토끼를 보여주며 삶의 미덕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교훈을 담고 있다. 치야다 작가의 ‘공 좀 주워주세요’(2022, 북극곰)는 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비틀어 새로이 바꾼 동화다. 파란 토끼는 새 공을 샀다. 하루종일 그 공을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앗! 하고 놀라는 사이 공이 담벼락 밑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내려가는 길은 너무 멀고, 귀찮다. 파란
동네책방
호수
2025.07.28 00:00
-
지난주에는 인공지능, 인간이 상상하는 완벽하고 순종적인 유사-인간, 즉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꼭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다수의 발밑을 받쳐주지 않으면 안되는, 지반이 되는 존재들. 먹이사슬 아래 단계에 있는 종족들. 바로 비인간동물과 보통 아닌 인간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 위에서 편하게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칙이 뒤집
동네책방
호수
2025.07.14 00:00
-
챗 GPT와 각종 편의를 위한 AI가 범람하는 시대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편안한 삶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인공지능이 우리를 넘어설까 두려워한다. 편리한 기능을 위해서라면 인공지능이 인간과 가장 흡사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우리는 윤리적 문제가 없는 인간 노예를 바라는 것이다. 만들어진 영혼은 타고난 영혼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지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옳고 고결할까? 윤리적 문제가 없고 존재만으로도 정당할까? 단요 작가의 장편소설 ‘개의 설계사’(2023, 아작)는 이러한 질문을 정면으로, 노골적으로
동네책방
호수
2025.06.30 00:00
-
자아에 대한 이야기,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은 많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란 또한 새로웁다. 오늘 소개할 그림책이 바로 그렇다. 남기림 작가의 ‘너무 가벼운 아이와 너무 무거운 아이’(2025, 곰곰)다. 색연필로 그린 듯 따뜻한 색감과 콜라주 기법으로 구성된 세계는 혼란스럽다.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하자 먹구름과 망가진 물건들이 굴러다니고,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서로의 닻이 되어주는 것은 서로 뿐이다. 너무 가벼운 아이와 너무 무거운 아이는 홀로 존재할 때 바닥으로 푹 꺼지거나 하늘로 휭 날
동네책방
호수
2025.06.16 00:00
-
다가오는 29일 전주팔복예술공장에서 2025전주국제그림책도서전이 열린다. 매년 5월마다 그림책 작가, 독자, 출판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되는 전주국제그림책도서전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강연과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사인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전북 전주에서 개최되는만큼 광주에서 이동하기도 그리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테니 많이들 방문해보실 수 있다면 좋겠다. 올해 초청되어 사인회를 진행하는 작가 중 필자의 관심을 확 끌어당긴 이름도 있었다. 바로 ‘키티 크라우더’다. ‘밤의 이야기’, ‘포카와 민 시리즈’, ‘시간의
동네책방
호수
2025.05.26 00:00
-
대선 경선 준비 과정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날씨도 하루하루가 오락가락인 날들이다. 원래 한 치 앞 인생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25년의 초입은 유독 더 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할 수 없는 먼 이야기들, 기후외기며 정치며 하는 것들에 이끌려 다니다가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여겨지는 때다. 라울 니에토 구리디가 그림을 그리고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2024, 책빛)는 이러한 탈력감에 경종을 울리고, 또 새로운 힘을 실어주는 이야기다. 넓은 들판에 가득찬 사
동네책방
호수
2025.05.12 00:00
-
꽃샘추위가 용을 쓰는 모습 뒤로 봄이 무르익고 있다. 꽃이 피고 햇빛이 반짝이며 점점 새소리가 들린다. 철새들이 여름을 맞아 이 땅에 날아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빌딩숲 사이를 노니다가 머리를 박고 죽음에 이르는 일들이 우후죽순 늘어날 일도 얼마 남지 않았고 말이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하루 약 2만 마리, 연간 800만 마리의 야생조류가 고층 빌딩의 유리창, 도로의 투명 방음벽과 같은 인공적인 구조물에 충돌해 부상을 입거나 폐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 기반 자연 활동 공유 플랫폼 ‘네이처링’에는
동네책방
호수
2025.04.28 00:00
-
봄이다. 쨍한 햇빛이 지구 표면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수없이 많은 날 모였던 광장은 이제 윤석열 파면이라는 국면을 맞아 잠시 쉬어가는 느낌을 준다. 사회대개혁이라는 이름을 달았던 만큼 완전히 닫혀버리지는 않을 테지만, 하나의 거대한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후련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장장 5개월간의 긴장이 풀리는 초봄이다. 광장은 많은 사람들을 낯선 타인에서 동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동지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목적이나 뜻이 서로 같은 사람
동네책방
호수
2025.04.21 00:00
-
지난달 28일 오전 8시,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교사 지혜복과 연대동지들이 경찰에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 함께하던 공공운수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회장 동지는 서울시교육청과 경찰의 폭력에 다리가 부러졌고, 스물세명이나 되는 동지들이 서울 각지의 경찰서로 호송 및 구금되었다. A학교에서 학생이 당한 성폭력 피해 사안을 공익제보한 교사 지혜복의 부당전보 및 해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던 1박 2일 농성투쟁 도중이었다. 이날 경찰들은 일부 연대 시민동지를 “일반 시민”이 아닌 “말벌 시민”이라며 잡아가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동네책방
호수
2025.03.10 00:00
-
내란 정국으로 인해 시작된 연대의 불씨는 1월이 다 가도록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연대하고자 하는 시민들도, 현장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활동가들도 이 열기가 어떻게 해야 계속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기다. 배제와 혐오를 피해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금지하거나 멈추는 것보다, 무언가를 더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고, 또 자주 정당화한다. 새로운 것을 하는 것보다 오래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옥
동네책방
호수
2025.02.03 00:00
-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래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역할은 달력의 끝과 시작을 나누는 것일 뿐, 시간을 식빵 자르듯 갈라내지 못한다. 나는 새해가 시작되는 그 날에 거제에서 한화오션 조선하청지회 투쟁문화제에 함께했고, 해가 넘어가고서도 몇 번이나 거리에서 시간을, 그리고 밤을 지새웠다. 달력은 넘어갔지만 일상은 넘어가지 않았고, 이 넘어가지 않고 연결되는 모든 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정말 원하는 새해는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4년 12월 초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동네책방
호수
2025.01.13 00:00
-
내란 정국이 해를 넘길 모양이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매 주 거리로 나오는 것이 당연하게 된 것과 별개로 우리는 지친다. 삭신이 쑤신다. 옷 틈새로 새어드는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바람만이 살을 에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말도 살을 엔다. 거리에서 윤석열 퇴진을 외치던 누군가가 ‘건희야 이혼해라’라고 외친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으나 가슴 안쪽에서 싸늘함이 느껴진다. 남태령의 연대에 감사를 표하는 전농의 무지개떡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이들은 ‘무지개떡을
동네책방
호수
2024.12.30 00:00
-
혼란한 정국, 막막한 시국이었다. 12월 3일부터 많은 사람이 밤잠 못 이루며 나라의 불침번을 섰다. 윤석열 탄핵, 윤석열 퇴진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하나의 메시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하늘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며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14일, 탄핵 소추안이 국회 임시회에서 가결되었다. 하늘로 풍선이 날아가고 응원봉이 빛나고 사람들은 다음 단계인 헌법재판소에서 보자며 서로를 응원했다. 마침내 쥐게 된 하나의 승리였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이 깃발이 어떤 사람들은 배척하고 어떤 사람들은 없는 셈
동네책방
호수
2024.12.1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