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순의 호남의 명산] 강진·장흥 수인산(563m)
닭 벼슬바위, 터키 카파도키아 닮아 환상적 산줄기
강진군 병영(兵營)면은 한때 잘나가던 군사도시였다. 병마절도사가 주둔했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호남지역 육군 사령부로 볼 수 있다. 인구 2만 명에 육박했던 까닭에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꽤 번성했다. ‘병영’이라는 지명도 왜구의 출몰을 막기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에 광산현(현 광주)에 있던 군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반명사가 된 것이다.
병영성(兵營城)을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조선 개국공신 마천목 장군(1358~1431)이 초대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성터를 고민하던 중 꿈에 나타난 노인의 가르침대로 활을 쏘았는데 성터에 해당되는 곳만 눈이 녹아있어 눈의 자국대로 축조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백성들을 지키는 단단한 성채 역할을 했으나 동학혁명 때 함락당하는 오욕의 역사를 안고 이듬해 폐영되었다가 최근에 망루를 비롯한 성벽의 복원이 이뤄졌다. 병영성 뒤로 장막처럼 길고 깊은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는 곳이 수인산(修仁山563m)이다.
홈골제 출발, 북문·홈골 하산 코스 추천
수인산은 강진과 장흥의 경계를 가른다. 높이에 비해 웅장하고 암릉으로 둘러싸인 철옹성 같은 자연 요새다. 험준한 산 속에는 갑옷을 입은 듯 또 하나의 산성이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해 천년을 지켜온 무려 6km에 달하는 수인산성(修仁山城)이다.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수인산성은 유사시에 백성들의 피란처이며 강력한 공격 거점이었다. 지금도 성의 전체적인 골격은 골짜기를 따라 온전한 형태가 남아있다. 수덕마을 동문에서부터 오르면 거의 온전한 성곽을 볼 수 있다.
대체로 홈골제에서 정상(노적봉)을 거쳐 북문에서 홈골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많이 하지만 산행 들머리로 잡은 곳은 장흥군 부산면 자미(子美)마을이다. 여기서 산행을 시작하는 건 놓치기 아까운 절경을 보기 위함이다. 자미마을 끝에 작고 아담한 수미사(修美寺)가 있고 절 뒤쪽에 특별한 볼거리들이 몰려있다. 20m 높이의 커다란 병풍바위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6m 높이의 마애여래좌상 음각돼 있다. 더불어 병풍바위 왼쪽 산신당 암벽에 있는 ‘젖꼭지바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커다란 유방과 봉긋한 유두가 선명한 자연이 만든 걸작이다. 병풍바위를 통과하면 능선 경사면에 솟은 ‘닭 벼슬바위(계관암)’의 이국적인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되었던 터키의 카파도키아처럼 뾰족뾰족한 바위가 솟아있는데 그 모습이 장닭의 벼슬을 닮았다. 샛별산악회 김영환(64)씨의 말처럼 “익룡이 날개를 활짝 펴고 오르기 직전 모습”인양 얇고 높은 퇴적암 석벽이 길게 이어진다.
산성서 정상에 이르는 매력적인 길
닭벼슬바위에서 5분만 더 오르면 254봉 주능선에 올라선다. 혹처럼 삐죽 솟아있는 수리봉(412m)까지는 0.8km 완만한 능선 오르막이다. 등산로 곳곳에는 이정표가 거리까지 자세하게 표기되어있어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되며 등산로 정비 상태도 양호하다. 솔숲 사이로 보이는 주변 시야도 크게 가리지는 않는다. 수리봉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우회해 급경사 내리막을 다시 역으로 차고 오르면 수리봉 암반에 오를 수 있다. 더할 나위없는 조망이다. 호수처럼 보이는 장흥댐과 부춘정(富春亭)의 평화로운 모습, 바둑판 모양 들판 너머로 장흥시가지와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의 V라인에 흠뻑 취할 수 있다.
20여 분 동안 바위능선과 잡목숲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 수덕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길이다. 이후 소의 목덜미처럼 주름 잡힌 능선을 1시간 가까이 걷는다. 파노라마처럼 변하는 풍경을 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거대한 암봉과 능선을 교차하다 허물어진 담장 같은 수인산성에 들어선다. 성벽이 무릎 높이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산 자체가 이미 성벽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며 험한 지형과 계곡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 꿈틀거리는 지네처럼 보인다. 남문까지 경계석 수준의 성벽 길을 따라가면 된다.
북문터 사거리에서 10여 분 가량 가파르게 오르면 노적봉 정상이다. 수십 명이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높이가 9자에 이르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대신 사방 막힘 없는 훌륭한 조망이 기다린다. 호수같은 장흥댐은 산이 물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물에 산이 떠 있는 것인지 모를 선경이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북문을 거쳐 서문 터로 향하면 또 다른 절경이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남근바위들이 연이어 서 있는 것 같다. 3층 건물 높이의 수직 석벽이 2개로 갈라져 있고 틈으로 올라갈 수 있다. 병영시내와 멀리 월출산의 장쾌한 줄기까지 한눈에 담을 수있다. 석벽에는 자연을 노래하는 글이 있으면 좋으련만 욕심 가득한 사람들의 이름만 빼곡하게 음각되어있다. 주변에는 집터와 맷돌, 우물터, 기와편 흔적들이 무수하게 남아있다.
병풍바위 옆에 조선 세종 때 창건되었다는 수인사(修仁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근처에 석문암과 청련암이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6.25를 거치며 소실되었다. 산 아래 있는 수인사는 그 이후로 창건한 것이다. 병풍바위 아래쪽으로 헬기장을 거쳐 수인사까지는 30분이면 내려갈 수 있다. 남문에서 481m봉과 278m봉을 지나는 능선은 공 굴러가듯이 완만하고 편안하게 내려서는 길이다. 홈골제까지 빠른 걸음으로 40여 분이면 충분하다. 1급수처럼 깨끗한 홈골저수지에서 병영성까지는 시멘트 농로 따라서 15분 정도면 가능하다. 예나 지금이나 성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 하는 자의 치열한 사투는 변함없다. 성벽이 백성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항상 준비하고 강인한 군대가 있어야 백성도 있고 나라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산행 길잡이
자미마을-수미사-젖꼭지바위-계관암-수리봉-성터-남문-정상(노적봉)-병풍바위-481봉-홈골제-지로마을(약 5시40분)
홈골저수지-수인사-남문-북문-정상(노적봉)-북문-홈골-홈골저수지(8km 3시간40분~)
▲숙식(지역번호 061)
텅 비어있는 방에 앉아 있으면 한상 가득 백반 한상 딱 부러지게 나오는 두곳이 있다. 특히 달달한 돼지고기 석쇠구이로 이미 미식가들의 입맛을 평정한 곳이다. 원조격인 설성식당(433-1282) 보다는 수인관(432-1027)이 좀 더 정갈하다는 평이다. 반주로 설성막걸리를 곁들이면 금상첨화, 2인분 3만 4000원으로 점심때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볼거리
하멜기념관이 병영읍내에 있다.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네델란드인 하멜과 일행이 조선 효종 1656년부터 7년 동안 병영에 억류 되었다. 1998년 하멜의 고향 네델란드 호르큼시와 자매결연을 하여 2007년 12월에 개관한 기념관이다. 당시의 도자기, 생활도구, 고지도 등 2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오전 9시 개관 오후 6시까지 무료 관람 가능하다.
글·사진= 김희순 山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