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방 우리책들] 슬픔은 코끼리(2025, 반출판사)
9월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온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가을 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을은 한 해의 끝을 조심스럽게 알리는 시기이며, 올해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돌아보아야만 하는 시기이다. 그리하여 가을은 별 수 없는 슬픔이 인간을 파고드는 계절이다. 낸시 화이트 사이드가 글을 쓰고 타마라 엘리스 스미스가 그림을 그린 <슬픔은 코끼리>(2025, 반출판사)는 이렇듯 우리에게 파고드는 슬픔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슬픔은 코끼리>의 그림은 따뜻하다. 크레파스를 뭉갠 것처럼 부드러운 선과 색감들, 그리고 주인공 ‘너’를 그려내는 소담한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다. 슬픔은 코끼리의 형상으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림자도 거대하고 본 모습도 거대하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고 숨쉬기 어려울 만큼 짓눌리기도 한다. 괜스레 밀어내지 않고 내가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봐도 슬픔은 따라온다. 아주 빠르게, 아주 바짝.
‘너’는 코끼리 같은 슬픔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해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고, 도망치는 것도 녹록지 않다. 하지만, 결국에는, 코끼리는 사슴이 된다.
쉿,
천천히 움직여야 해.
뒷걸음질로 살금살금.
하지만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슬픔은 귀가 엄청 크거든.
<슬픔은 코끼리> 중에서.
무언가 거래를 한 것도, 슬픔에게 정답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도망치고, 애쓰고,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짓누름을 견디고 견디다보면 슬픔은 어느새 작아져 있다. 귀가 크고, 예민하고, 나의 부정적인 마음을 전부 알아채고 다가올 수 있는 모습으로. 간절히 바라면 사라질 수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의 슬픔은 여우다. 사슴보다 더 귀가 큰 모습이다. 이제 슬픔은 ‘너’의 이야기를 듣는다. 슬픔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다보면 ‘너’의 마음을 달랠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슬픔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나를 잡아먹으려 하지는 않는다.
슬픔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창가에서 기다리거나
밖으로 나가서 놀아도 괜찮아.
어쩌면 날이 어둑할 때 올지도 모르지.
<슬픔은 코끼리> 중에서.
여우만큼 작아진 슬픔은 어느새 생쥐만해지고, 생쥐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다 보면 그것은 반딧불이가 된다. 반짝이는 감정이 된다. 슬픔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고 괴롭게 하기만 하는 감정이 아니다. ‘감격’이고, ‘그리움’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짜 감정’에 대해 알기 위해서라면 ‘너’는 한참동안 슬픔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슬픔이란 부정적인 감정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쨍한 여름이 가고 쌀쌀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하게 될 가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쓸쓸함을 외면하려 한다. 가을 타나봐, 라는 말로 커다란 코끼리를 무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방 안에 코끼리가 있을 땐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코끼리는 무시한다면 사라질 수도 있지만, 사슴과 여우와 생쥐는 아니다. 그것들에게 충분히 내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간 다시 돌아온다. 여우로, 사슴으로, 그리고 코끼리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지는 이유는 어떤 말을 꺼낼 용기를 얻기 위해서다. 코끼리가 방에서 사라졌을 때, 코끼리로부터 도망치다가 사슴을 마주쳤을 때, “이젠 가을이 다 지나갔구나”하고 안심하기보다 왜 내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직접 나의 슬픔에게 속삭여주어야 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문의 062-954-9420
호수(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