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유출돼 일본식 정원 장식물 전락했을까?
벌써 입동이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교토의 대표적 향토 요리인 유토후(湯豆腐)의 계절이 돌아왔다. 유토후는 본래 사찰에서 즐기는 정진요리(精進料理)의 하나로, 교토 난젠지(南禪寺) 부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기 냄비에 물과 다시마·두부를 넣고 끓이다가 적당하게 익으면 두부를 꺼내어 다레(양념장)에 찍어 먹는 요리이다. 비교적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다레의 바리에이션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다레 맛으로 먹는다고는 하지만 역시 두부가 맛있어야 한다. 교토는 예로부터 물이 좋아 두부 요리가 발달했고, 유토후라는 교토 요리를 탄생시켰다.
유토후의 노포(老鋪) 중에서도 아라시야마(嵐山)에 위치한 유토후사가노(湯豆腐嵯峨野)가 유명하다. 유토후사가노는 두부로도 유명하지만, 또 하나의 명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게 입구의 나무 울타리 앞으로 즐비한 12개의 석상이다. 유토후사가노의 입구를 지키는 12개의 석상은 누가 보아도 조선시대 능묘에 설치한 석물인 문인상이다. 이 정도의 문인석을 모으려면, 여러 개의 능침을 털어야 했을 것이다.
조선 왕릉의 능침 공간은 상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나뉜다. 하계에는 무인석 1쌍 또는 2쌍과 석마(石馬)를 배치하고, 중계에는 문인석 1쌍 또는 2쌍과 석마를 세웠으며 중계 가운데에는 장명등을 세웠다. 상계 가운데에는 장방형의 혼유석(石牀)을 놓고 혼유석 좌우에는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변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배치하였다.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서·북 3면에는 곡장을 둘렀다.
일본으로 유출되어 일본식 정원을 장식하는데 사용된 석물은 문인석·무인석·동자석·장명등·망주석·석양·석호 등의 의장 석물이다. 유토후사가노의 12기의 문인석은 선대 오너가 일본의 골동품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할 뿐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
사가노는 1965년 교토 아라시야마(嵐山)에 창업하였지만, 본관 건물은 1957년 오사카 도톤보리 근처에 있었던 료칸 후쿠다야(富田屋)의 건물을 옮겨 온 것이다. 12개의 문인상은 본관에 딸려 현 장소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므로, 이미 일제 강점기에 유출되었던 석물일 것이다.
교토 동쪽 마루야마 공원 근처에는 로코코 양식을 한 유서 깊은 건물이 한 채 서있다. 메이지 시대 ‘담배왕’이라 불렸던 실업가 무라이 기치베(村井吉兵衛)가 1909년 고향 교토에 국내외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영빈관 죠라쿠칸(長樂館)이다.
죠라쿠칸은 일본 근대사의 주역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오쿠마 시게노부(⼤隈重信)· 야마가타 아리토모(⼭縣有朋) 등이 애용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52년에 주인이 바뀐 이후 현재까지 레스토랑·카페를 겸한 숙박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죠라쿠칸의 정원 한쪽에 오층탑이 서 있고, 오층탑 뒤쪽 나무 그늘에 96cm의 동자상 1기가 서있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으로 건물을 끼고 돌아가면 2기의 문인상이 수줍은 듯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 있다. 모두 조선의 능묘를 지키고 있었던 석상이다. 현재 오너가에서 호텔업을 시작하면서 석물들을 따로 구입했을 것이라는 직원의 설명이 있지만, 원래 주인이었던 무라이 기치베의 활동을 생각해 보면, 이들 석상은 죠라쿠칸의 창건 시절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라이 기치베는 담배전매제도가 실시되기 전까지 일본을 비롯해 미국산 연초를 원료로 종이 궐련을 제조하여 판매했던 인물이다. 무라이는 궐련의 판매시장으로써 일찍부터 조선에 눈독을 들였다.
1894년 8월에는 인천에 지방 대리점을 두고 궐련초를 판매하였으며, 조선에서 생산한 담배 닢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조선의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하였다.
1904년 담배전매제도의 전면적 실시에 따라 무라이의 기축 사업이었던 담배의 제조와 판매 사업이 정부에 매수되었고, 그 대가로 받은 배상금 2400만 엔의 투자처로 조선을 선택한 것이다. 무라이 농장의 소유 면적은 1908년에 4200정보(町步. 1정보=3000평)였다가, 1920년대 전반에는 3600정보로 감소하지만, 논만 해도 2600정보에 달하는 대농장이었다.
무라이 소유의 논들은 주로 경상남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소작제로 운영되었다. 1927년 금융공황에 의해 무라이 은행이 도산하고, 이와 동시에 조선의 소작제 농장도 전부 매각되었지만, 조선에서 철수할 때까지 33년간 그는 조선에서 경제활동을 이어왔다.
죠라쿠칸이 세워지던 시기에도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죠라쿠칸의 석상은 무라이가 조선에서 직접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2024년 겨울의 초입에서 79년간 돌아오지 못한 채 교토의 정원에 잠들어 있는 조선의 석상에 대해 잠시 상념에 잠겨 본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