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미래 구속하기도, 또는 무력한 에피소드일 수도
‘과거’란 사전적으로 ‘지나간 일이나 삶, 그리고 지나간 때’를 의미하지만, 일상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좀 더 부정적이다. 모든 인간은 과거를 가지고 있고, 과거의 영향을 받으며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인 오늘은 또다시 과거가 되듯 과거라는 주문(呪文)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힘은 절대적이고 엄청난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과거는 어떤 이에게 절대적인 힘으로 현재와 미래를 구속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무력하고 무해한 한편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읽다 말다를 거듭하다가 겨우 며칠 전에 완독한 책이 있다. 『한 남자(ある男)』(히라노 게이이치로, 2020)라는 책인데, 영화로 제작되어 몇몇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였다. 시네필(cinephile)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2022년 제27회 부산 국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였다.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개인이 안고 있는 과거가 각자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를 봉인한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과거는 그들의 삶에 균열을 가져온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찾아온 삶의 균열
다니구치 리에(谷口里枝)라는 여성은 규슈 미야자키현 출신으로 요코하마의 한 대학을 나와 은행에 취업하고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리에가 진학하던 90년대 중반의 일본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20%대(‘23년도 여성 대학 진학률 53%, 산케이)였다는 점을 참고한다면, 리에의 삶은 산촌 출신 여성으로서 비교적 안정적이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리에의 안정적인 삶은 둘째 아이가 뇌종양에 걸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은행을 퇴직하였으나 결국 아이는 힘든 항암치료 끝에 죽는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과 엄마로서의 희생을 강요받았던 리에는 남편과 갈등하다가 결국 이혼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가업인 문방구 일을 돕다가 손님인 다니구치 다이스케(谷口大芥)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된다. 이 재혼도 오래가지 못하고 남편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2011년 11월 목재 벌채 중 산재로 사망한다.
재혼한 남편의 사망 1주기에 찾아온 시아주버니에 의해 남편이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닌 다른 사람(‘X’)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은 남편에 대한 조사를 변호사인 기도 아키라(城戶章良)에게 부탁한다.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닌 남편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리에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 진실을 직시하기로 한 것이다.
기도 아키라는 리에가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할 때 소송을 담당했던 인연으로 리에의 죽은 남편 ‘X’의 과거를 조사한다. 그는 귀화한 재일조선인(자이니치) 3세로 요코하마의 부유한 의사 집안 출신의 아내와 평범한 삶을 영위하지만, ‘X’를 찾는 과정에서 마주한 ‘혐한 데모(헤이트 스피치)’로 인해 정체성 혼란과 정치·사회적 신념이 다른 아내와의 갈등을 경험한다. 그에게는 ‘혐한 데모’와 관동대지진의 참사가 오버랩되며,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재일조선인이라는 과거(뿌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내뱉는 북한에 대한 비난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언사에 상처를 넘어서 공포를 느끼지만, 조금씩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재일조선인임을 알린다.
기도 아키라는 1년간의 조사 끝에 리에의 재혼 상대인 ‘X’가 일가족을 살해한 살인범의 아들로 두 번의 호적 매매를 통해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선량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X’의 인생에는 항상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다른 사람의 호적을 샀던 것이다. 결국 그는 불법이기는 하지만, 호적 매매를 통해 과거를 바꾸고 새로운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일견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일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평소에는 내적으로 침잠되어 있던 과거가 언제든지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실제로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일본 사회에서 극우에 의한 ‘혐한 데모’가 심각해졌다. 기도 아키라가 느끼는 두려움은 ‘혐한 데모’가 관동대지진처럼 촉매제가 주워진다면 언제든지 일상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라는 지뢰를 안고 사는 삶
모든 인간은 과거라는 지뢰를 안고 살아간다. 과거는 평소에 조용해서 존재감을 느낄 수 없으나 계기만 주어지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라는 지뢰가 터지지 않게 과거를 다독이며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힘들지만 진실을 추구했던 리에처럼, 재일조선인임을 인정하게 된 기도 아키라처럼,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해 호적 매매라는 불법을 행한 ‘X’처럼 과거와 화해한 사람들은 과거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는 한일 양국 간의 외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196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합의(2015)와 같은 법리적 접근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이미 한일 양국의 과거사는 집단심리 혹은 집단상처가 되어 버렸다.
친한파 일본인이라 자칭하는 오구라 기조씨의 견해(『한국의 행동원리(韓國の行動原理)』,2022)에 따르면, 일본 사람들은 한국이 역사 문제에 대해 너무 일본 의존적이어서 일본만을 나쁘게 보고, 양국 간에 이루어진 국제적 약속을 아무렇게나 파기해 버리는 떼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사과는 상대가 받아들일 때까지 진실한 자세로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점은 고노 담화(1993)와 같은 진실한 사과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양국 관계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기회는 있다. 일본이 진실한 사과를 하고, 한국이 그 진정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