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조난 동료 구조 위해 ‘심방’을 찾다
일본 인류학의 기둥 제주도 연구로 학위

제주도 보목포구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광주드림 자료사진
제주도 보목포구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광주드림 자료사진

 자못 세밑 풍경이 어수선하다. 2024년은 국내 안팎으로 유난히 변화가 많은 해였다. 개인적으로 올 한 해는 참으로 바쁜 해였다. 몇 편의 탐라 관련 글 덕분에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기회가 많았다. 인생 오십 줄에 들어서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뿐 아니라 학문과의 만남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국사를 공부하다 일본사로 전향한 것도, 제주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쓰게 된 것도 모두가 인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많은 인연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한 인연은 좀처럼 조우하기 어렵다. 그러한 만남 중 운명 같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이즈미 세이이치라는 청년이 제주도를 만나, 전후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가 된 이야기이다.

 이즈미 세이이치(泉靖一)는 마부치 도이치(馬淵東一 1909-1988)와 더불어 20세기 일본 인류학의 양 기둥이라 일컬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경성제국대학과 타이베이 제국대학에서 일본의 식민지를 필드로 하여 트레이닝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일본의 인류학은 서구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학문으로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인 이즈미 아키라(泉哲)가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경성에서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등산가로서 조선의 산악에 심취

 1933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35년에는 법문학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시기 이즈미는 10대 시절부터 빠져 있던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스키 산악회와 학우회 산악부를 이끌고 금강산 집선봉과 비로봉, 북한산 인수봉, 도봉산 선인봉 등 조선에서 가장 높은 그레이드 암벽 등반에 도전하였다. 법문학부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공부보다는 등산가로서 조선의 산악에 심취해 있었다. 1935년 이즈미는 일주일간 지리산을 종주하였으나, 북한의 산악에 비해 덜 험준하고, 암벽 등반의 재미도 없어서 다음으로 선택한 곳이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한라산 사전 답사에서 현지의 산촌인으로부터 이제껏 12월에서 4월까지 한라산 정상에 오른 이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설기의 한라산 등반을 계획한다. 경성에 돌아오자마자 이즈미는 12월에서 이듬해 1월에 걸쳐 한라산 등반을 준비하였다. 이즈미를 대장, 조선 철도국의 이이야마 다쓰오(飯山達雄)를 지도원으로 하여, 총 9명의 등반대원이 꾸려졌고, 친선을 위해 내지의 나니와(浪速) 고등학교 산악부가 합류하기로 하였다.

 등산대원들은 모두 조다이(城大 경성제대의 약칭) 학생들로 북한 산악의 등반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12월 30일 이즈미 일행은 영림서(산림청 소속 지방 관청)의 조력을 받아 관음사 방면에서 개미목과 관모봉을 경유하는 한라산 북쪽 코스를 택하였고, 나니와 고등학교 산악부는 한라산 남쪽인 서귀포 쪽에서 등반하여 백록담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1월 1일 백록담에 먼저 도착한 이즈미 일행은 얼어붙은 백록담에 천막을 치고 나니와 고등학교 산악부를 기다리기 위해 일행 일부가 식량을 가지러 개미목으로 내려갔으나 기상 악화로 그중 한 명이 조난을 당하였다. 실종자는 가장 앞서 스키를 타고 달려갔는데 귀신에 홀린 듯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즈미를 비롯한 조다이 산악부는 소방, 경찰, 영림서의 도움을 받아 7일간 수색을 계속하였으나 실종자를 찾지 못하자, 제주도 사람들이 심방(神房 무당)에게 물어보라는 조언을 주었다. 제주의 심방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마에가와(前川)군은 죽지 않았어. 신들이 그를 보호하고 있어’라는 신탁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종자는 발견되지 않았고, 수색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이즈미는 홀로 마에가와가 지나갔을 법한 코스를 되짚어가며 수색을 계속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5월 하순께 제주도의 유지들이 개미목 산장 근처를 수색하다가 잔설 속에서 유체를 발견하였다.

 식민지 아닌 제주도 사람들 시선서

 산악대의 대장이었고, 동절기 한라산 등반을 제안한 이즈미에게 동료의 조난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심방을 찾아갔고, 결국 심방의 신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 사람들과 심방의 진심이 이즈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심방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크게 바꾸었다. 이즈미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과 함께 생활하고, 조선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싶었다. 특히 마에가와군이 잠들어 있는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알아보고 싶었다. 마침 경성제대에서 종교학·사회학을 가르치며 샤먼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고 있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로부터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Kasper Malinowski)의 『서태평양의 원양항해자』(1922)라는 원서를 추천받고 인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즈미는 1936년에서 3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1938년 ‘제주도: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제출하였다. 졸업 후에는 대흥안령, 내몽고, 소오대산, 서뉴기니아를 조사하였고, 패전 후에는 메이지대학 교수를 거쳐 1953년 도쿄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동양문화연구소와 교양학부를 겸직하였다.

 1970년 타계하기까지 대마도 조사, 아이누 조사, 브라질 일본 이민자 조사, 페루의 코토슈 유적 발굴 등 현지 조사 중심의 문화인류학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이즈미 세이이치의 인류학이 동시대의 다른 학자들과 다른 점은 식민지배자의 시선이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주도를 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즈미의 이러한 자세는 한라산 조난 사고 때 보여준 제주의 심방과 현지인의 마음에 감동한 것은 아닐까 한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드림투데이(옛 광주드림)를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드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