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 성종(993년)때 거란이 침입했다. 땅을 떼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이른바 ‘할지론’은 오판이었다. 서희 등 ‘국풍파’가 나서 탐색해보니 거란의 의중은 땅이 아니었다. 송과의 관계 단절, 즉 그들과 관계 맺음을 원했다. 중원(북송) 정벌에 나설 참인데, 후방의 고려가 자신들을 칠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도 니네랑 교류하고 싶어. 그러니 중간에 버티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 줄래.”
통했다. 거란의 힘을 빌려 여진족을 몰아내고, 고려는 강동 6주로 진출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장된 계기. 칼과 창을 이긴 외교의 성공 사례다.
역사상 수많은 외교가 있었고, 정립된 원칙도 명료하다. ‘상대를 알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오랜 전쟁 끝 평화 유지 차원에서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 테레즈가 당사자. 문제는 스페인 왕실에 남성 후계자가 단절 위기라는 환경이다. 프랑스로 시집간 공주가 아들을 낳을 경우 스페인을 승계할 수 있는데, 이건 스페인이 프랑스에 먹히는 걸 의미했다. 양국 외교관들이 이 문제를 두고 협상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거액(50만 에퀴)을 받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을 포기했다. 노림수가 있었다. ‘완납’을 단서로 단 것이다.
“스페인은 이런 거액을 절대 납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한 프랑스 재상 마자랭의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 협상이다. 훗날 예상이 맞아떨어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루이 14세의 손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근시안적 외교 언사…국내외 정세 불안
최근 윤석열 정부의 외교에 관한 뒷말이 무성하다. 근시안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언사로 국내외 정세를 불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민 살상 및 핵무기 사용 등을 했을 때 살상무기 지원 또는 군을 참전시킬 수 있다.”(윤 대통령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러시아는 이에 대해 “살상무기 지원은 사실상 참전한 것으로 러시아를 향한 직접 공격”이라고 경고했다.
대만과 관련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 로이터통신과 인터뷰)
중국 외교부장은 이렇게 응수했다. “대만 문제로 불장난하는 자는 반드시 불에 타 죽을 것”이라고.
한미동맹을 과시하기 위해 적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인가. 동맹은 태평양 건너 먼데, 울타리 넘어 주변국의 독기 어린 ‘으르렁’에 밤잠 설치는 날 많겠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한마디는 이런 윤 정부의 외교 자세를 겨냥한 듯 하다. “한국처럼 여러 주변국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안고 살아가는 나라의 대통령이나 외교장관은 가급적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을 쓸 수밖에 없다. … 하나의 문장으로 다수의 다른 청중을 겨냥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을 향해 어떤 말을 할 땐, 이걸 북한·중국·일본 그리고 러시아는 각각 어떻게 듣고 해석할 것인가를 염두에 둬야 한다.” (한국일보 인터뷰)
프랑스의 전설적 외교관인 탈레랑(1754~1838)의 어록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외교관이 ‘예’라고 말하면 ‘아마도’라는 의미다. 외교관이 ‘아마도’라고 말하면 ‘아니다’는 의미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외교관은? 실격이다.”
칼과 창을 부르는 외교, 이전에도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아버지 선조에 이어 왕에 오른 광해군은 1618년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린다. 요지는 “대충 싸워라”쯤 되겠다.
당시 중국에선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명나라의 쇠퇴 조짐이 뚜렷했고, 만주족의 후금이 새로 부상 중이었다. 이때 명나라가 ‘후금 토벌’ 명분으로 조선에 원병을 청했을 때 광해군의 대응이 중립외교였다. 해서 명의 파병 요구는 일단 수용, 강홍립 군을 출전시켰다. 대신 밀지를 내려 후금에 투항토록 했다.
신하들은 이를 ‘패륜’으로 몰고 반정을 일으켜 인조로 정권을 교체한다. 그리고 펼쳐진 정반대의 외교, 재앙을 불렀다.
명나라의 멸망(1644년)이 17년 전이었지만 ‘사대’를 내세우다 후금에 정묘호란(1627년)을 당했다. ‘형제 관계’로 겨우 무마한 뒤도 명에 대한 “의리”를 고집해 9년 뒤 병자호란(1636년)을 불렀다.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에게 임금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다. 더 큰 고통은 백성들 몫이었다. 당시 60만 명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사고 팔리는 노예로 전락했다. 국익이 정권 따라 달라질 리 없음이니, 이를 최우선시해야 할 외교 노선의 진중함을 일깨운다.
후대에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아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자신의 책 ‘협상의 전략’에서 “쉽게 타협하면 역사가 복수한다”고 했다. 한일청구권협정이 그 예다.
1951년 9월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부터 꼬였다. 태평양전쟁 당사자인 연합국과 일본 간 전쟁 종결 조약인데, 51개국이 이 협정에 서명했지만, 한국은 끼지 못했다. 일본의 전쟁 범죄에 따른 배상을 확정한 협정에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 배제된 건, 일본의 적극적인 협상에 이승만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겹친 결과였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협상을 피하며 실질적인 대비를 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의 논리를 착실히 준비해 요로에 전달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한국은 전쟁 중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그들의 패전으로 분리된 지역으로 분류됐다. 전쟁 당사자가 아니어서 배상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분리에 따른 상호 재산 및 청구권만 발생한 배경이다.
이렇게 꼬인 첫 단추를 풀지 않고 이어 잠근 매무새가 제대로일 리 없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도, 배상도 없이 원조와 차관 등 모호한 개념의 7억 달러를 받고 ‘완전하고 최종적 해결’을 선언했다. 섣부른 타협은 윤석열 정부까지 이어진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하고, 대법원이 인정한 손해배상을 ‘3자 변제’로 떠안고 ‘최종적’이라며 사인했다. 가해자는 빠지고 피해자가 책임지는 ‘굴욕 해법’에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라는 한탄이 절로다.
지금 어렵다면 후대라도 모색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줌이 마땅하지만, 아예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심산인가보다.
‘외교 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시, 복수를 감내해야 할 역사의 반복이다.
후손들께 참, 염치없게 됐다.
채정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