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의미, 가치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미 지식의 보고가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읽는 텍스트 대신 보는 콘텐츠로 대체된 흐름이 강고하니 무슨 반전이 있겠나? 싶었는데 웬걸 이곳저곳서 책의 향연이다.
출판기념회 소식이 수시로 이어지니, 다시 책의 시대인가? 기대했다가도 “물정 모른다”는 면박에 뒤통수가 따끔해 헛웃음이 절로다.
책은 수단일 뿐,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정치(인)의 미끼뿐인 것을…
책은 종이를 원료로 출판이란 기술이 결합한 산물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책의 기본인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입지를 구축했다. 종이의 기원이 중국이라지만 품질로는 고려지(한지)에 범접하지 못했다. 최상의 원료인 닥나무를 다듬이질하듯 두드려서 만든 고려지는 밀도가 탁월해 먹이 번지지 않아 최상으로 쳤다. 반면 삼나무 등을 재료로 한 중국 종이는 밀도가 약해 한계가 분명했다.
출판 역시 우리나라가 단연 압도적이다. 목판이거나 금속 활자거나 ‘세계 최초’ 타이틀은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다.
목판 인쇄는 ‘무구정광다라니경’(750년), 금속활자는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현존하는 ‘최고(最古)’라는 기록이 세계사에 짱짱하다.
이토록 책의 물리적 기반은 탄탄했지만 만인이 향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로부터 종이는 아주 귀한 자원이라서 책을 소유하고 읽는다는 건 사대부에게나 한정된 호사였기 때문이다.
해서 조선시대엔 한 번 쓴 종이도 씻어서 다시 쓰는 게 당연시됐다. 먹으로 기록했으니 가능했던 작업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원천 자료인 수많은 ‘사초’들은 실록이 완성된 후 씻어서(세초) 재활용했다. 이렇게 사초를 물로 씻은 곳이 지금의 세검정 인근이고, 이를 종이를 만드는 관청이 조지서(造紙署)였다.
종이와 인쇄, 압도적 유산의 나라
중세 1000년 가톨릭이 유럽 문명을 지배한 건 이같은 기록의 독점 구조가 큰 몫을 했다. 중세를 지배한 사상의 핵심인 성경은 사제와 귀족들만 소유하고, 읽을 수 있었다. 종이 자체가 귀하기도 했지만, 라틴어로 쓰인 텍스트는 민중들이 해독하기 힘든 언어였기도 했다. 때문에 시대의 공기와 같았던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 사제가 읽어주는 예배가 유일했다.
이같은 구조에 균열을 낸 게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이다.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은거 중 루터가 했던 작업이 성경 필사였다.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다시 쓴 것이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 쓰여진, 보급용(?) 성경이 민중들에게 전파되고 이는 가톨릭 사제들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같은 루터의 성경 필사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보다 60여 전인 1450년 대 구텐베르크가 탄생시킨 금속활자 덕이 컸다. 서양의 금속 활자는 세계 최초인 ‘직지’를 인쇄한 고려말(1377년)로부터 70여 년 뒤이긴 했다. 하지만 한자보다 간결해 식자에 적합한 알파벳이란 구조가 인쇄엔 더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책은 역사를 기록하고, 때론 개혁하는 동력으로 작동했으니 인간사 최고의 걸작이란 찬사 속 현존하고 있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그 위상이 예전 같지 못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대학에서 은퇴한 교수들은 연구실에 꽂혀있던 책을 어찌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대학이나 도서관에서도 책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시대다.
출판인들이 ‘혐오한다’는 책의 수단화도 만연한 풍조다. 예의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대표적이다.
입지자로서 자신을 알리고,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벤트용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정치 신인들의 홍보 기회가 적고, 천문학적 비용이 준비돼야 하는 기형적인 선거 제도가 부른 파행이라는 항변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제도적 한계를 양심의 한계로 치환해 정당화할 순 없는 일이다.
“책의 운명을 통해 인간사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책의 유통을 담당했던 이들은 ‘서쾌’로 불렸다. 또는 책장수, 책주름이라고도 했다. 이중 영·정조대인 1700년대 중·후반에 활동하며 ‘신선’이라 불렸던 책장수 조생은 전설적인 서쾌로 기록돼 있다.
“세상의 모든 책은 내 것이다”고 했다는 그는 해가 뜨면 저잣거리로 골목으로 서당으로 관청으로 잰걸음으로 달려가서 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런 조신선의 고백으로 알려진 글이 있다.
“옛날에는 아무개의 할아버지와 아무개의 아버지가 책을 사들이더니 귀한 몸이 되고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지요. 지금 와서는 그 아들과 손자가 책을 팔아먹더니 곤궁해지더군요. 내가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겪어보니, 천하에는 슬기롭고 어리석으며 어질고 못난 사람들이 끼리끼리 무리 지어 쉬지 않고 생겨나더군요. 내가 단순히 책만을 이해할 뿐일까요? 책을 통해 천하의 인간사도 이해하지요.” (안대회 저 ‘벽광나치오’ 중)
한 집안의 영고성쇠가 장서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는 말이다.
해서 옛 선비들은 집안의 책이 흩어지는 광경이 가장 처참하다고 했다. 가문이 몰락해 생계가 막막할 때 마지막으로 내다 파는 자산이 책일진대, 그 벼랑 끝까지 몰렸다는 절망감이 컸으리라.
덧붙여 지혜의 보고라는 책을 현금화 수단으로 전락시켰음에 대한 지식인들의 자괴감도 짐작할 수 있겠다.
요즘, 잇따르는 정치인들의 출판 기념회를 두고 이같은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출마 수금회”라는 냉소도 노골적이다.
어느 행사에 한 번 참석했다가 여러 정치인들에게 “제 출판기념회에도 오실 거죠?”라고 눈도장 찍혀 진땀뺐다는 한 기관장의 하소연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경쟁하듯 책을 내고 수금이 일상화된 정치의 계절, “책의 운명을 통해 천하 인간사를 알 수 있다”는 옛 서쾌의 통찰력을 곱씹는다.
채정희 편집국장 goodi@gjdre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