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미국 독립혁명 전후로 본격화한 영국에서의 1차 산업혁명은 동력의 기계화가 견인차였다. 인간의 손과 근육에 의존했던 동력이 증기기관으로 대체된 게 이 즈음이다. 수직 운동이란 한계에 물레방아 만큼에도 힘이 못미쳤던 증기기관은 이 시기 와트에 의해 접목된 콘덴싱 기술로 거대한 힘을 장착하게 된다. ‘500 마력’쯤 이르고 보니, 공장을 세우고 공정을 자동화해 그야말로 산업 혁명을 이끌었다.
이어 독일·미국으로 전파된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가 결합해 한층 더 큰 동력을 확보했다.
20세기 들어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기반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을 넘어 지금 세상은 4차 산업혁명 깃발이 요란하다.
인공지능의 시대의 도래다. 이미 일상에서 체감 가능한 AI(인공지능)가 4차 혁명군의 선봉이다.
2000년 전 선지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며 예수의 초림을 예비했다. 요한은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으니, 뒤에 오시는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충분한 수사였다.
요즘 핫한 챗GPT가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비할 이 같은 선지자쯤 되는 걸까?
챗GPT는 어떤 선지자인가?
여기저기서 챗GPT 추앙이 넘치지만, 예비된 미래로 인도할 그 선지자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신문과 방송’ 2월호에 관련 글이 실려 흥미롭게 읽었다. 김성우 캣츠랩 연구위원이 쓴 글은 제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의 식견을 바탕으로 챗GPT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마커스 교수는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챗GPT와 같은) 플랫폼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모델이 아니라, 단어 연쇄(sequence·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모델이다. 언어가 종종 세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들은 종종 옳지만 실제로 세상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바의 정확성은 어느 정도 확률의 문제가 된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김성우 연구위원은 “챗GPT는 언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기에 언어 패턴을 가져오고, 단어를 교체하고, 단어들의 연쇄를 변주하고, 문법 구조를 변형하고, 문장을 연결하고, 스타일을 흉내낼 뿐, 자신이 생산한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면서 “언어 데이터를 통해 훈련받은 모델은 언어 밖을 ‘상상’하거나 비언어적 개념 체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평가 절하했다.
비유컨대 “챗GPT와 같은 언어모델은 무슨 뜻이지도 모르면서 말을 지어내는”, 한마디로 ‘허언증’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이다.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미국 MIT 명예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언어 생성 모델이 인간지능을 뛰어넘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면서 “진짜 지능과 기계학습 AI의 차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사고, 창의적인 비판력 그리고 사고해가는(thinking) 과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인용한 조숙경 한국에너지공대 교수는 “그의 말대로 인공지능(AI)이 인간지능(NI)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은 아직 먼 이야기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조 교수는 “지금도 전 세계 수억 명의 유저들이 챗 GPT와 대화를 하고 있고, 이렇게 생산된 콘텐츠는 새로운 빅데이터가 되어 인공지능의 딥러닝을 가속시킬 것”이라면서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더더욱 빨라질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500뇌력’ 시대,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
전문가들은 이미 ‘500 뇌력(두뇌력)’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인간의 뇌 용량의 500배에 이르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예비함이다. 이런 시대,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탑재할 외피, 이른바 숙주로서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인공지능의 역습, 더 가시적으로 다가온 미래상은 김영하 작가의 신작 ‘작별인사’에서 적나라했다.
클론으로 복제돼 장기 제공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선이)과 ‘최신형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로 설계돼 인간인 양 살아온 인공지능(철이)을 주인공 삼은 설정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소설의 배경인 미래는 이런 세상이다. “휴머노이드(기계인간)들 의식은 클라우드로 올라가 전 세계의 네트워크를 돌며 현존하는 최고의 인공지능들과 연결된다. 말 그대로 집단 지성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최신형 로봇을 만들어낸다.”
‘나는 인간이다. 절대 기계가 아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살아온 휴머노이드 철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마지막’이 이 소설의 제목에 부합한다. 옮긴다.
“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뭐가 다를까?”
인간과 기계의 결합, 인간성과 기계성의 혼재가 소설 속 얘기일 뿐일까.
지금, 인공지능의 진화가 가히 혁명적이다.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이 폭발적 기세다.
“이미 인간의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소설 속 재생 휴머노이드가 그를 만들어낸 인간들에게 내린 사형 선고다.
그런 시대로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뭘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게 ‘휴머니즘’을 구걸하는 것 외….
채정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