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버겁다. 뉴스가 무겁다. 또한 무섭다. 삶의 무게 만큼이다.
그럼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분노하고, 지쳐 외면하고, 그리곤 불안해한다. 다시, 뉴스를 찾는다.
‘실시간 뉴스 중독’이라는 요즘 세상의 굴레다.
신문이 매체의 중심일 때 뉴스의 유통기한은 하루였다. 다음날 새로운 뉴스가 발행될 때까지.
인터넷 세상인 지금, 뉴스는 휘발성이다. 분초단위로 새로운 소식이 업데이트 되니, 분노와 불안 때론 환희의 기제가 시시각각이다.
인간 삶의 축적이 역사일진대, 현대사회 그 저본(底本)이 될 매일매일의 ‘사초(史草)’가 무엇일까 묻는다면? ‘뉴스’라고 답하겠다.
오랜 세월, 뉴스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 공인된 존재는 유일하고 명확했다. 신문·방송으로 통칭되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다.
인터넷 기반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선 어림없는 소리다. 누구나 ‘사관’이 될 수 있다. 미디어 개념이 그만큼 확장됐다.
‘미디어’란 정보 전달의 매개체,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창으로 풀이된다.
신문·방송만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다. 페이스북·X·인스타그램 등 SNS 자체가 이미 언론이다. 텍스트에 기반한 이른바 1인 미디어.
영상에 기반한 유튜브 역시 주요 미디어다. 구독자 수에 따라선 개인이 운영하는 한 채널이 웬만한 언론사급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뉴미디어가 ‘레거시’(미디어)의 무게감을 깨뜨린 지 오래다. 해서 텍스트도 한결 가벼워지긴 했다.
정보가 넘칠수록 더 중요한 ‘팩트’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주겠다’는 건 19세기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의 장담인데, 필자는 현대사회에 대입해 ‘지금 어떤 미디어를 보는지 말하면 , 당신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다’고 각색해 보련다.
세상의 모든 기록은, 기록자의 ‘지적 편향’의 함축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록돼 궁극적으로 보전되는, 그 속성이 텍스트의 힘이고 굴레다.
텍스트가 가벼워졌다고 겨누는 창끝까지 무뎌진 건 아니다, 가벼운 건 가벼운대로 죽이고, 무거운 건 무거운 대로 죽인다.
그래서 백번천번 강조할 수밖에 없는 기록의 핵심은 ‘사실’(Fact)이다.
‘레거시’ 매체뿐만 아니라 뉴미디어도 마땅히 해당하는 ‘기본’이다. SNS에 글 쓰는 이들이 ‘사적 다이어리의 공적 배설’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기도 하다.
기록은 역사가 된다. 사실에 기반하면 정사이고, “떠도는 이야기”라는 혐의를 못 벗으면 야사에 그친다.
조선 연산군 시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사초로 남겨 필화사건으로 비화한 무오사화는 기록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료 중 하나다.
연산의 광기에, 비록 사초 작성자는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됐지만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반인륜적 범죄는 길이 새겨졌다.
반면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시민을 폭도라 칭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받아쓴 일부 언론은 허위사실을 박제하고 말았다.
사실 확인이 방기된 이같은 기록은 4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5·18에 대한 왜곡·폄훼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다.
사관이 죽지 않으면(죽을 각오로 작성하지 않으면) 역사가 왜곡된다.
‘소식’ 매몰되지 말고 ‘전령’을 보라
‘뉴스 보도를 믿을 수 있을까?’는 뉴스 자체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신문도, TV 뉴스도, SNS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소식을 주고 받았나?하며 저널리즘의 출현 과정을 추적한 ‘뉴스의 탄생’ (앤드루 페트그리 저)을 참조한다.
전령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에 뉴스의 가치가 좌우됐던 시대. 저자는 “뉴스는 원칙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계층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신뢰와 명예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라고 했다.
신뢰와 명예, 지금 뉴스에서도 유효할까?
미디어 확장으로 정보가 넘칠수록 신뢰도는 하락하고 있다.
반전이 있긴 하다. 정보의 홍수 속 ‘사실’을 좇는 독자들 눈빛은 더 날카로워졌다는 점이다. ‘뉴스’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전령’이 누군지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계엄 사태 속 레거시 미디어가 재조명된 게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신문의 부활을 기대한다는 건 아니다. 흘러간 물로 방아를 돌리겠다는 무모함이 아니고서야 다변화된 콘텐츠 시대, 활자매체의 위상 약화를 부정하기 어려운 탓이다.
이 시기, ‘신문과 방송’(한국언론재단·2024년 3월호)에서 이지형 저널리스트가 제시한 ‘한국 언론의 나아갈 길’이 눈에 띄었다.
‘언론 플랫폼과 헤어질 결심, 먼저 할 일은 구태의연한 자신과 거리두기’라는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 언론의 방향성은 “기사 아닌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고, 언론사 아닌 콘텐츠 공급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 ‘비즈니스’ ‘테크놀로지’를 언론의 세가지 축이라고 하는데, 이어진 현실 비판은 냉정했다.
“지금 언론의 테크놀로지는 단순했고, 비즈니스는 폭력적이었고, 저널리즘은 동어 반복이었다.”
사실과 생존, 다시 주어진 과제
새해 벽두, 미디어 단상이 비장했다. 한탄에 그쳐선 도리가 아닌 것 같아 희망의 단서를 찾아보지만 여릿하다. 다만 ‘치유하기 위해서라면 쓴 약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는 됐다는 데에 새해 의미를 더한다.
끝으로, 최근 심란한 뉴스들 때문에 불안하다는 독자들께 한 구절 소개한다.
“뉴스에 많이 나온다고 해서 고통이 더 큰 것은 아니다. 뉴스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이 좋아졌기 때문일 수 있다.”
<팩트풀니스(사실충실성)·한스 로슬링> 에서 ‘부정 본능’의 사례로 제시한 대목이다.
요컨대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 우리에게 전달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인데, 위안이 되실런지….
채정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