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잠 못 이루며 뒤척이다 수면 장애의 원인을 추적해 본다. 어렵지 않게 짚이는 건 ‘검은 음료’, 그것이다. 평상시보다 더 많이 마셨더라 싶더라니.
커피의 역사를 따져보면 이같은 추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으로 퍼져 대중화된 커피는 ‘잠을 쫓는다’는 이같은 특성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시면 쉽게 흥분되고, 잠들기 어려워진다. 식욕도 사라진다.’
어찌 보면 부정적인 효능이 분명한데, 이를 역으로 활용해 즐겨 마신 이들이 이슬람 수피교 수도사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저)
신앙적으로 흥분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기 위해(수행), 식욕을 억제하기 위해(고행) 커피를 마셨다는 설명이다.
이후 유럽으로 전파돼 ‘커피 하우스’라는 공간을 거점으로 공론장의 매개가 됐고, 이는 근대 시민사회의 대두로 이어졌다.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사람과 사람이 모여 술에 취하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는 곳, 신분제 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유럽의 시민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론의 무대가 됐다.”(‘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중) 정신을 혼미케 하는 알코올과 니코틴과 달리 늘 깨어있게 자극하는 음료, 커피 본색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이처럼 막대하다.
육체적 각성제였던 커피가 카페를 통해 사상적 계몽을 이끌었다는 설명이겠다. “프랑스 혁명의 인큐베이터가 된 게 커피와 카페”라는 저자의 주장이 이에 기반한다.
그 시기, 시민들이 카페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커피와 뉴스, 시민사회 태동 원천
‘뉴스의 탄생’(앤드루 페티그리 저)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인쇄술이 발달한 1450년 무렵부터 뉴스 시장의 발전과 변화상을 추적한 기록이다.
‘정보를 얻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 사회 자체만큼 오래된 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인쇄술 발전 이전에도 새로운 소식을 얻기 위한 노력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소식의 과제는 진실성 확보임은 과거에도 변함없었다.
정보가 부정확해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도 잘못 전달된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게 이 책의 기록이다. 1588년 스페인이 무적함대를 앞세워 잉글랜드를 침략했을 때, 최초엔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선을 격파했다고 잘못 알려진 게 대표적이다. 정확한 뉴스 이전 루머나 희망사항이 먼저 유포돼 공황이 발생하거나 축하 행사를 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스 보도가 폭발적으로 늘고, 상업화되면서 등장한 게 ‘여론 관리’다. 상업지의 경우 돈 많은 구독자들 구미에 맞는 뉴스만 취사 선택되고 때론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신구교도 간 종교 전쟁으로 피폐해진 17세기 유럽의 뉴스 발행인들은 같은 편의 뉴스만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8세기, 뉴스가 대전환기를 맞았다. 통신망 구축과 발전에 기반한다. 평범한 시민들도 여행을 가거나 서신을 주고받거나 뉴스를 보고 구매할 수 있게 된 때다.
뉴스가 풍부해졌던 이 시기, 유럽에서 ‘커피 하우스’가 유행했다.
이 대목에서 예의 ‘그 시기, 시민들이 카페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에 대한 답도 추론 가능하다. “뉴스”였을 것이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적 공기를 이해하면, 세계사를 뒤흔든 굵직한 혁명(미국독립혁명·프랑스혁명)이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 시민 의식의 성장이 커피와 뉴스의 합작에 기반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오버일까?
뉴스의 진실성, 전달자의 평판에 달려
다시 커피의 시대를 목도한다. 거리마다 커피하우스(카페)가 넘쳐나고, 또한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 한 자리를 차지하고 한잔을 즐기는 은퇴자의 여유가 일상의 풍경이 되고, 청소년들에겐 스터디룸 기능까지 더해진다.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해 각자의 공간으로 사라지고, 차에서 내릴 여유조차 없는 이들은 ‘드라이브 스루’로 쏜살같이 들고 빠진다.
커피하우스는 넘치지만, 여럿이 모이는 공론장으로서의 역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현대인의 개별화·파편화된 삶과 정보 통신과 스마트 기기의 발달이 주된 요인일 테다. 1인 미디어로 대표되는 다양한 플랫폼이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환경을 구축한 영향도 크다.
공론의 불쏘시개가 돼야 할 뉴스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뉴스의 본령인 신뢰성과 직결된다. 급증한 매체 수만큼 거짓, 왜곡, 편파 보도의 그늘이 너무 짙다. ‘기레기’라는 오명이 이같은 현실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아 고착화한 게 지금의 언론 환경이다.
커피는 자연이 내린 원액 그대로 각성 효과 온전한데, 뉴스는 그 가공 기술이 정교해져 혼돈 기제를 노골화한 탓이다.
“뉴스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뉴스가 사실일 때만 그렇다.” (‘뉴스의 탄생’ 중) 신뢰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뉴스의 시대에 더 곱씹게 되는 문장이다.
뉴스가 믿을만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면, 전해진 정보의 진실성은 ‘전달자’의 평판에 따라 좌우되기 마련이다. 뉴스 소비자들이 뉴스 이면, 보도 매체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어느덧 뉴스 ‘전달자’로서 역할해온 게 20년이다. 광주드림은 믿을만한 매체였을까?
창간 스무돌, 세월 그만큼 장성한 골격으로 신뢰의 초석을 더 굳건히 하겠다는 다짐을 드린다.
채정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