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정희 편집국장.
채정희 편집국장.

 브리튼 왕이 왕국을 물려주겠다면서 세 딸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달라고 한다. 하늘의 달이라도 별이라도 따줄 듯한 충성 경쟁이 예견된 일.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얼개다.

 “(…) 가장 값지다거나 희귀한 것 이상으로(…) 모든 한계를 다 넘어 전하를 사랑하옵니다.” 첫째 딸 고너릴의 아부는 통했다. 기름진 산림과 풍요로운 들판이 그의 몫이 됐다. 둘째 딸 리간도 못지 않았다. “인간사 모든 감각이 주는 기쁨을 뒤로하고 오로지 전하의 사랑 속에서만 행복해진다”고 속삭이니, 리어왕이 안 넘어갈 재간이 없다.

 왕이 누구보다 아꼈으니 기대도 컸던 셋째 딸 코딜리아의 답은 뜻밖이었다. “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 사랑할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리어왕’ 비극의 잉태다. 말과 마음(본심)의 간극, 꾸밈의 성찬에 무장 해제돼버린 분별력 저하로부터다.

 고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는 동생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권력 다툼이 불문가지. 로마제국 실권자 카이사르를 ‘뒷배’ 삼고 싶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아부’는 노골적이었다.

  “이집트의 모든 재산은 당신의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이집트를 구할 진정한 파라오입니다.” 통했다. 카이사르의 야심과 자존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강력한 원군을 확보했다.

 “자신의 이익 위해 윗사람 비위 맞추기”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이재명 대통령의 ‘아부의 기술’이 회자된다.

 “‘오벌 오피스’를 꾸미고 있다고 들었는데 밝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게 정말 보기 좋다.” ‘집무실 찬사’로부터 시작됐다.

 또 다우존스지수의 상승세를 소재로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중동 등 분쟁지에서 평화를 조성하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노벨 평화상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트럼프 맞춤형 아부였다.

 회담 이후 국내외에선 이 대통령의 ‘트럼프 비위 맞추기 전략’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앤드루 여 미 브루킹스연구소 한국 석좌는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대할 때의 일반적인 공식인 아부(flattery)를 잘 준비했다”고 논평했다.

 임진왜란 막바지,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섬멸코자 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한 축인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은 의지가 없었다. “퇴각하는 적을 굳이 쫓을 필요 있나?”는 식이다.

   “우리 땅을 침범하고 돌아가는 왜군을 곱게 보낼 수 없다”는 이순신에겐 진린의 태도 변화가 절실했다. 자신이 세운 공을 진린에게 넘기고, 미리 적의 수급(머리)을 준비해 전과를 보고토록 구슬렀다. ‘아부의 기술’로 부를 만 하다. 그렇게 상황을 반전시킨 뒤 조명 연합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단순한 아첨을 넘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교한 기술’이라는 아부의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다.

 권력자의 판단을 흐리게 해 야기되는 정책 실종과 민심 왜곡, ‘아부’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박장범 KBS 사장은 과거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논란과 관련해 ‘파우치’라는 용어로 낯 뜨거운 이슈메이커가 됐다. 그가 앵커 시절인 2024년 2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김건희 여사가 받은 명품 ‘디올백’을 “조그마한 파우치”라고 지칭한 게 발단이다. 그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희대의 아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최근 국회 과방위 KBS 결산 회의에서 민주당 노종면 의원이 이 장면을 다시 소환했다. 그는 박 사장을 향해 “(…)소위 말하는 희대의 아부, 권력자가 받은 부당한, 명품으로 불리는 물건에 대해 의미를 축소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아부라고 평가한다”라고 일침을 놨다.

   이어 “김건희가 받은 뇌물, 지금까지 특검에서 확인한 것들에 비춰볼 때 박장범 당시 앵커가 얘기했던 ‘300만 원짜리 디올백은 정말 조그마한 것이었구나’ 이런 취지에서 박장범이 옳았다. 이런 평가들이 나온다”고 비꼬았다.

 빛과 그림자 강렬한 ‘고도의 기술’

 아부에 홀린 리어왕은 충성을 맹세했던 첫째·둘째 딸로부터 버림받아 비참한 말로를 맡는다. 리어왕의 비극, “코딜리아로 대표되는 사랑이 있음이 없음으로 표현되어 허위처럼 들리고, 고너릴과 리간으로 대표되는 사랑의 없음은 있음으로 표현되어 진실처럼 들린다는 모순에서 시작된다”는 평론(최종철 교수)이 눈에 띈다.

 클레오파트라 ‘아부의 효과’ 역시 시한부였다. 카이사르가 죽자, 로마의 새로운 권력자인 안토니우스를 향해 같은 기술을 재현해야 했다. 그리고 결말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아부의 기술은 통상·외교 분야 트럼프식 압박과 청구서를 무마하는 데까진 나아가지 못했다.

 ‘당의정’이겠다. 일시적으로 쓴맛을 감출 순 있어도 본질을 변화시킬 순 없다. 본 마음은 조만간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아부 이후’ 전술이 중요하다.

 아부의 빛과 그림자가 이처럼 강렬하다. 그럼에도, 중요한 순간 역사적 흐름을 바꾸고 정치적 지형을 흔들어왔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무비용 립서비스. 수천 년 인류사, 변치 않는 효능감을 자랑해온 ‘강력한’ 기술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전략을 다시 주목한다.

 채정희 편집국장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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