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일상을 여행처럼

도갑사 경내를 향한 단풍.
도갑사 경내를 향한 단풍.

 흔한 여행은 세차례의 절차를 거친다. 여행의 준비과정에서 설레임으로 시작하는 과정, 두 번째는 현실을 벗어나 여행자가 되어 마주하는 과정, 마지막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것저것을 정리하며 회상하는 과정까지다. 하지만 여행과 관련한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르다. 준비도 하지 않고 가서 그냥 일상적인 순간까지도 마치 여행인 것처럼 말을 늘어놓는다. 아마도 삶이 여행이라고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필기구가 없어도, 카메라가 없어도 그들이 뿜어내는 말은 여행기가 되어 읽는 이들을 혼돈하게 한다.

 며칠 전의 필자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11월 16일 토요일의 아침은 고단했다. 전날 있었던 영암 삼호읍의 달빛축제가 가졌던 여러면에서의 유발효과와 앞으로 야간축제가 갖춰야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새벽까지 이어졌던 탓이다. 무언가를 비판하고 뒷담화하는 것보다 앞날에 대한 맑고 투명한 이야기는 힘을 가진다. 그럼에도 유용한 말들의 성찬이 길어지는 것은 헛수고다. 술 깨면 말짱 다 잊어 버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이 힘들었을까? 여덟시반 영암에 ‘영암생태로드 달빛누리길’ 선포식이 있어서다.

영암 달빛누리길 선포식.
영암 달빛누리길 선포식.

  선연한 단풍빛 사이로

 가벼운 배낭을 메고 행사에 참여하고 누릿길중의 하나인 기찬묏길 5km 구간을 걸었다. 지역의 사회단체에서 참여해서 구간별로 꽃과 나무를 식재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길이었다.

 월출산 구정봉으로 향하는 대동제 무렵에 이르니 단풍빛이 선연하게 빛난다. 어둑시근한 산길에서는 붉디 붉은 옻나무의 가지가 통째로 떨어지고,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노란 황금잎들의 군락도 그 바닥에는 수북히 쌓인 잎들로 융단같은 포근함을 선물해준다.

 필자도 그 틈에 끼여 후배와 은목서 한그루를 식재하고 도선국사가 스님으로 들어섰다는 월암사쪽에서 길을 내려섰다. 영암 시종면의 두부가 맛나다더니 묏길 걸은 기념으로 두부와 묵은지를 차려놓았다. 이정도면 아침과 점심을 모두 섭렵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읍내로 돌아와 텃밭에 심어놓은 20여 포기의 배추 사이에 풀을 제거하고 고흥으로 향했다. 오후 세시에 고흥에서 전국에서는 여덟 번째 완공되는 ‘꿈다락 예술터’ 개장식이 있어 축하하러 간 것이다. 내심 여기에서 다음주의 여행기를 쓸까 하는 유혹도 느꼈지만 내려 놓았다. 고흥은 역시 유자가 더 찬바람에 익어가며 노랗게 향을 뿜어내 주어야 되는 곳이라는 편견 탓이다.

 그렇게 고흥에 도착해서 청소년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도록 만들었는지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목공이나 도예 같은 작업을 넘어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제작하고, 우주와 소통하고 꿈꾸도록 구상하고 이를 실현하는 기반인 창작소 같은 플랫폼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정부때 공모를 통해 선정된 것이 이제 완성된 것을 보면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을 것이다.

고흥분청박물관의 천경자특별전.
고흥분청박물관의 천경자특별전.

  고흥이 낳은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이런 일을 해낸 후배들이 고흥에 있기 때문에 축하하러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공식 개장행사가 끝나고 나는 다른 지역에서 온 후배와 더불어 고흥분청박물관으로 향했다.

 고흥이 낳은 천재 화가 천경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시를 하고 있어서다. 도슨트 선생님의 세밀하고 열정적인 설명을 비껴 나름대로 여러 진품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고흥인의 DNA가 풍성하시구나 라는 생각에 멈췄다.

 과거 척박한 땅, 하지만 거의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사람의 기질을 화백께서는 시작점에서 초화류라든가 풍류의 현장을 기반한 그림을 그렸다. 마치 송수권 시인이 “우리나라의 풀이름 보고서”라는 시집을 상재했듯이. 그러다 드디어 이 판을 뛰어넘어 중앙으로 해외로 넘나들기 시작했다. 중동과 태평양을 방문하며 우리 고유의 색감과 이색적인 문화와의 접점을 캔버스에 담아내신 것이다. 하니 세계적인 여성화가로서의 명성안에 그 자양분이 고흥에 있음이 당연지사 아닌가.

 이번 전시도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후배로부터 들었기에 더 충분히 보려 노력했다. 그러다 호출의 전화가 오고 우리는 황가오리가 있는 도라지식당에서 오랜만의 해후를 보상받으려는 듯 열심히 먹고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고흥을 나왔다. 벌교의 장암에 들러 이제는 귀한 대접받는 참꼬막 몇킬로 박스에 모셔와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121일까지 월출산 국화축제가 열리는 기찬랜드에서 여행감독이라는 직업을 창직한 고재열 기자를 만났다. 12명의 방문객이 영암을 찾아 주신다고 약속이 되어 있어 점심때까지 영암의 진면목을 보여 드려야 하는 숙제가 내게 주어졌다.

도갑사성보박물관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
도갑사성보박물관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

  도선수미왕사비각서 진면목 영암

 먼저 기찬랜드가 조성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행사와 공간들을 1억 만 송이의 국화향과 함께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천년고찰 도갑사로 갔다.

 차를 입구에 두고 안내도에서 문수사찰로서 도갑사의 역사와 도선국사와의 관계를 말씀 드리고 차꽃과 굴거리나무와 해양성기후에서 잘 자라는 나무들이 육지화 되며 변화해 가는 과정을 공유했다. 해탈문에서 아금강과 훔금강역사상을 뵈고, 사자위의 문수보살과 코끼리 위의 보현보살상을 설명하며 진품이 도둑 맞아 돌아오고 다시 도둑을 맞으려 해서 결국 성보박물관에 안치되어 복제품을 보는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도갑사 미륵전 계곡의 단풍과 여행자들.
도갑사 미륵전 계곡의 단풍과 여행자들.

 광제루 갤러리에 월출미술인회가 정성들인 작품을 보고, 석조와 5층탑과 대웅보전의 벽화까지 세세히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제법 찬바람이 감도는 가운데 하이라이트인 도선수미왕사비각으로 갔다. 단풍이 오래 머무는 계곡인지라 이미 눈부신 치장을 하고 있는 단풍이 시선을 앗아갔다. 바람결에 흩날리면서도 아직 잎을 내려놓지 않는 단풍에 젖어보고 드디어 마주한 비각은 장대했다. 총 공사기간 21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고심하고 방책을 세웠을 스님들의 법력과 이를 지지하고 기꺼이 일손을 내어준 백성들의 염원은 비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조각된 귀부와 이수, 탑비의 문양 하나하나에 스며들어있었다. 이렇게 세세히 돌다보니 벌써 점심시간, 우리는 점심이 예약된 예담은 규방문화원으로 찾아갔다.

정갈한 월출소반 상차림.
정갈한 월출소반 상차림.

  영암의 풍미가 넘치는 음식까지

 관광두레 사업의 일환으로 ‘월출소반’이란 특식을 개발해 이제 상용화된 밥상이다. 창밖으로 월출산의 가을이 여물어가고 소반에는 영암의 풍미가 넘쳐나는 음식들이 식욕을 당겨주었다.

 고재열 감독은 광주 출신으로 시사인의 기자 생활을 20년 하던 해 그 일을 마감하고 전국을 넘어 세계의 명소와 명인들을 찾는 여행을 큐레이션하여 직접 실행하는 새로운 여행의 패턴을 창조하는 일에 진심인 분이다. 서로 벗이 되어 담양, 서울, 영암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도모해 왔던 것이 오늘 찐하게 깊은 영암의 가을을 함께 한 이유다. 광주비엔날레를 향하는 일행들에게 또 뵙기를 청하며 일과를 마치었다.

 그 사이 고흥유자축제를 마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향 영암에 왔으니 커피한잔 하자는 청이다. 그래 보자꾸나 하고 구림마을 위 도갑사 입구 죽정리에서 보자구 했다. 죽정리를 휘도는 갈림길에서 나는 차를 멈추고 친구와 국장생을 만나러 갔다. 영보마을 출신의 친구는 처음 접하는 길이라 했다. 연이어 정조대왕의 건릉에 향탄을 올렸던 숲이라 표기된 바위를 보여주었다. 내부자의 시선에서 만나는 것과 외부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의 간극을 우리는 웃으며 저녁 밥값으로 대신 하자고 했다.

 담양 사람이 안내하여 들여다보는 영암, 제법 재미있는 프로젝트라 여겨지며 도갑사로 친구를 이끌었다. 오전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지만 삽상한 바람이 더 상쾌한 발걸음을 유도했다. 그런데 운좋겠도 이번에는 성보박물관이 문을 열고 있었다. 문수와 보현보살을 친견하는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상상력 가득한 벗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자를 캐릭터로 무언가를 도모하면 좋겠다며 무한한 가능성을 설파한다. 가까이 소중한 자원들이 즐비해도 등하불명처럼 무감하게 지나치기 쉬운 세상에 지혜가 모이면 더욱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둘만의 답사도 퍽 멋들어진 오후가 되었다.

광암마을 명다헌 뒤안의 물길.
광암마을 명다헌 뒤안의 물길.

 우리는 그 사이에 영광에 있는 벗을 한명 초대했고 매력한우라는 식당에서 기다렸다. 맛난 술을 들고 달려와 세 명이 된 우리는 식당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도란거리며 얘기꽃을 피우고 다음날 점심 무렵 영암의 비경을 찾아 나섰다. 학산면에 있는 광암마을의 명다헌 찻집이 목표였다. 월요일의 찻집은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한 가운데. 결국 오래된 돌담과 골목을 서성거렸다.

 가을 담쟁이가 올라서는 돌담은 그 자체로도 이미 문화재였다. 마을을 나와 다시 찻집을 찾는다. 구림마을의 ‘월요카페’도 휴일이었다. 도갑사 들어가는 길, 카페하루가 문을 열어 차 한잔을 음미하고 산문에 들어섰다. 이틀사이 세 번째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은 월출산 도갑사의 성성한 모습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단풍에 또 취해갔고 이것을 기록하며 네 번째 단풍을 맞이하고 있다.

단풍으로 휩쌓인 도갑사계곡.
단풍으로 휩쌓인 도갑사계곡.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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