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역사 넘어 미래로
점심을 먹고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가네이시 성터로 향했다. 오후 3시부터 시작할 조선통신사 행렬재현은 이즈하라항구축제의 클라이막스와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쓰시마섬의 이즈하라항구에서 매년 8월 첫째주 토요일과 일요일날 진행하는 축제의 역사는 멀리 1964년으로 거슬러 간다. 지역 상공회가 주축이 되어 상공업의 활성화와 관광진흥을 위해 시작했다고 전한다. 주요 프로그램은 가장행렬, 불꽃놀이, 무대공연이 주를 이루는데, 1980년부터 조선통신사 가장 행렬을 진행했다고 전해준다. 그때는 이곳 쓰시마 섬 조선통신사행렬진흥회분들이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한복을 가져다가 서투르지만 조선인 행세를 하며 시행했다고 한다. 그후 이 모습을 본 부경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고 강남주교수를 비롯한 한국의 학자들은 놀라움에 우리 언론에 알리고, 부산 지역의 정치인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며 수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부산서 시작된 재현행사·문화사업회 발족
쓰시마번이 나서서 조선통신사를 초대하고 본토인 에도까지 안내했던 그 소중한 역사를 일본에서만 기리고 있음이 안타까워 부산에서도 2001년 광안리 해수욕장 바다축제 기념으로 행렬 재현을 시작했다. 이어서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 기념으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행사를 하고, 이를 본격화할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가 발족되었다. 그뒤를 이어 2011년 부산문화재단이 우호교류협약을 맺고 재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단체의 교류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오게 된 것이다.
내가 여기 일행에 초대되어 온 이유도 바로 그런 선린교류가 영암으로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부산문화재단의 배려가 있어서였다.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지 연락협의회가 18개 지자체와 70개 단체, 100명 이상의 개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과 우리 한국에도 이와 관련한 연합회가 서울과 공주와 부산, 그리고 영암까지 참여해서 움직이고 있다. 이런 민간의 교류는 한일관계가 경색 국면이 되더라도 성신교린(誠信交隣: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로써 교류한다)이라는 모토로 움직였던 역사가 현전화 되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더 큰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네이시 성터에서 열린 화려한 퍼레이드
정갈하게 다듬어진 가네이시 성터로 가니 이미 옷을 갈아입은 행렬들이 시작의 신호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부산시의원으로 오셔서 통신사의 가장 수장인 정사와 부사를 맡으신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시작된 행렬은 쓰시마 번주를 비롯한 일본이 무사들이 길을 트고 뒤를 이어 국서를 실은 가마가 이어가고 다음에는 한국에서 온 취타대가 행렬이 다가옴을 알리는 연주를 한다. 그 뒤에 정사와 부사와 종사관이 가마를 타고 따르며, 뒤를 이어 부산의 춤패 배김새가 한국 고유의 춤으로 행렬을 장식하고, 다음으로 풍물패가 이어지는 3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이즈하라 시내를 관통했다.
이들이 활보하는 대로변에는 쓰시마시민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서 있고, 카메라를 든 사진전문가들이 연신 따라가며 앵글에 이 모습을 담아 넣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계속따라가며 모든 장면을 휴대폰 카메라에 넣었다. 사실 이 출장여행을 준비할 때 DSLR 카메라를 가져와야 한다는 강박을 떨구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어떤 장면이건 내가 찍어야 마음이 놓이는건데 재단의 대표라는 직함을 갖다보니 놓아야 할 것들이 생겨났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소중한 기회 마저도 모른척 넘겨야 하는 처지이다. 하여튼 휴대폰의 성능을 믿기로 하고 따라가지 않는 척 따라가는데 저만치 부산문화재단 대표님이나 팀장이 함께하는 것을 보고 나도 안심했다. 도심 한복판을 야단스럽게 거닐던 행렬은 수로가 있는 좁은 길로 돌아오고 그 시간이 50여분이 지나니 처음 출발했던 성문으로 다시 들어선다. 영상 32도가 넘는 날씨, 구름한점 없는 땡볕을 행렬도에 나온 옷차림으로 걷는 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알기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이들이 빨리 짧은 옷으로 갈아입길 바랬다. 본 행사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쓰시마박물관의 로비에서 국서교환식까지가 이어졌다. 정사와 부사가 참여하여 쓰시마의 번주에게 조선왕의 뜻을 담은 국서를 전달하는 외교마당이 이뤄진 것이다.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예의와 절도 속에 무사히 진행되었다. 땀으로 범벅된 거리 행렬의 귀퉁이에서 연신 사진을 찍느라 지친 몸을 끌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도 주요관계자 석식회로 공식 행사의 일환이니 또 몸을 만들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민간단체와의 교류 제안, 더 깊어진 인연
그렇게 저녁시간이 되어 만찬장소로 가니 하늘에 독수리 같은 새가 창공을 떠돌고 있다. 그러고보니 쓰시마에 머무는 동안 하늘에서 떠도는 새를 자주 목격했다. 이번에는 렌즈에 담고 싶어 하늘만 응시했다. 날개를 폈을때는 독수리 종류인데, 머리를 보면 까마귀 같았다. 그 새와 눈맞춤을 하면서 2000년대 겨울에 왔을 때 전봇대에 앉은 독수리가 떠올랐다. 우리의 홍도나 흑산도처럼 새들의 정거장 역할을 이 섬이 하고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가니 잘 진행된 행사에 대한 쓰시마 시장님의 감사 인사가 있고, 술도 한순배씩 돌리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나도 그 틈에서 이런 저런 영암의 이야기를 해 드리고, 우리도 교류의 한 꼭지를 담당했으면 하는 바람도 전해 드렸다. 아울러 한국의 정원 문화와 관련한 이야기도 소재로 올라오기에 20대 말에 머물렀던 소쇄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무척 흥미로워 하셨다. 70세이신 히타카츠 나오끼 시장님은 농업고등학교와 대학 조경학부를 전공셨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기왕에 영암군의 왕인박사 유적과 소쇄원을 엮어 한번 오시라고 초대의 말씀을 드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찬을 마쳤다.
이제 부산문화재단 일행과 우리는 공식행사가 끝났으니 편하게 담소할 공간을 찾고 있었는데, 다시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은 부산문화재단의 팀장이 시장님과 부시장님이 애프터를 기다리신다고 해서 또 그곳으로 찾아갔다. 작고 아담한 선술집이었다. 생맥주와 병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못다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과 다른 일본인들의 세심한 배려가 드러나 보이는 자리였다. 거기에 마감할 즈음 시장님과 부시장 두분이 계산서를 가져다 놓고 각자 분담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은 공식 업무가 아니기에 사비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공직의 어르신이 보여주는 이런 태도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일 아닌가 싶어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모두가 즐거운 자리를 파하는데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또 다른 자리가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공직자들이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부산재단 식구들이 익숙한 듯 닫혀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축제 행사위원회 관계자들이 뒷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는데 우리까지 일행을 합치니 20여명 정도가 빼곡하게 선술집을 채웠다. 한데 서빙을 하는 분을 보니 낯이 익었다. 우리 차를 운전해준 공무원이다. 삼촌네 가게라고 본인이 돕는다고 했다. 여기 있는 것은 다 자기 것과 마찬가지니 그냥 가져다 먹으라고 말하는데 진심이 느껴졌다. 여기에서 또 한명을 만났다. 쓰시마시청의 보건국 부장(국장) 아비루 마사오미인데 자신이 민간공연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시 소속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그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이었다. 쓰시마 시에는 시 소속예술단은 없고 이 단체가 유일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영암과도 교류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통역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침 또 나이가 나와 동년배라고 해서 우리는 한층 더 가까이 이야기를 주도 받았다. 축제의 이야기와 교류에 관한 이야기로 쓰시마의 마지막 밤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성신교린을 새기며 부산으로 돌아오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을 찾았다. 화강암 바위를 뚫고 계류가 흐르며 소가 만들어진 거대한 암반층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곡성의 도림사 계곡과 순창군 동계면의 장구목, 설악산의 오색약수터 계곡 등과 흡사해 보였다. 청류교라는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에 다가가니 더욱 그런 비슷한 정취로 다가왔다.
내친김에 한곳을 더 방문했다. 바닷가에 인접한 스미요시신사, 바닷물이 너무 맑아서 돔이 헤엄쳐 맴도는 것을 내내 따라 다닐 정도였다. 우리도 경관이 좋은 곳에 명산대찰이 있듯 이곳에도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는 신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점심은 관계자들의 공식 오찬과 이후 일정에 대한 협의였다. 그랜드호텔에서 짧았지만 강렬했던 이지하라항구축제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고 오후 3시30분 배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성신교린의 자구가 마음으로 새겨진 여행이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