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옛것의 숨결따라 걷는 여행

마주보고있는 쌍계사지 석장승.
마주보고 있는 쌍계사지 석장승.

 [관련 기사] 돌 위에 새긴 염원…국장생과 고인돌을 찾아서

 그렇게 4기의 고인돌은 그 옛적 선사인의 무덤에서 중세인들의 믿음의 공간으로 재 조정되고 한편으로는 부처를 찾아 가는 나그네들이 발품을 쉬어가는 장소의 역할로 변화 되었다가 이제는 길 한켠에 있는 듯 없는 듯 풍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갑사 가는 길로 눈을 돌려보니 이곳에도 돌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세운지가 오래되지 않은 장승은 한편으로는 기괴하고 또 한편으로는 출신지가 어디인지 궁금해지는 표정으로 삼거리중에 사찰로 가는 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장수 발자국과 향탄비와 국장생과 고인돌, 그리고 현대판의 돌장승까지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특징을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잠시 멈추기만 해도 금방 온기 지닌 옛것들을 알현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행여 도갑사 가시는 길이라면 부디 이 안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갑사 들머리 현대식 장승.
도갑사 들머리 현대식 장승.

 이제 나는 차를 돌려 백리 벚꽃길로 나와 학산면 방향의 지방도를 따라간다. 붉은 벽돌의 버스정류장에 목포-남송정-영암 이란 글씨가 보인다. 여기서 왼편으로 보면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임도가 있다. 이리로 200여m를 들어간다. 영암 메밀방죽옆 장생이다. 산이 흘러내린 모서리에 다듬지 않은 돌이 소나무와 어슷하게 서 있는 모습은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안내 표지판이 있으니 당연히 주변에 유적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화강암의 돌에 장생이라는 글씨가 마모됐지만 눈에 들어온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이 또한 죽정리의 국장생이나 소전머리의 황장생과 비슷한 시기거나 혹은 더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메밀방죽옆 정류장.
메밀방죽옆 정류장.

 명실상부 국가 장생

 요즘 용산에서 얘기되는 국격과 견주어 봤을 때 명실상부한 국가의 장생인데 저렇게 손도 대지 않고 그냥 글자만 새기었을까 싶어지기도 하지만 풍찬노숙에 시달려오며 바윗결이 떨어져 나갈듯한 모습에 그래 이게 원조일지도 모르겠다 고개 끄덕이며 3기의 장생과 조우하는 시간을 마감짓는다.

 돌로 만들어진 원형질의 장생이 이제 장승으로 변화하고 각각의 마을과 고갯마루로 들어온 시대는 고려 이후의 시대로 상재해야 할 듯 싶다. 사찰의 위엄을 옹위하고 지킴이 역할을 하며, 경계석의 역할에서 마을로 내려와 쉽게 재료를 구하고 제작할 수 있는 나무로 재질이 바뀌며, 이제는 마을의 경계와 질병을 막는 수호신으로서의 신성이 부여되고, 이정표의 기능까지 겸하게 되는 시대로 진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름도 장생에서 장승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나무로 바뀐 장승이지만 아무 나무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근원을 아는 나무인 밤나무가 가장 애용되는 나무였다. 밤나무는 밤톨에서 씨앗이 발아하고 무성하게 성장해도 그 밤톨을 끝까지 떨어뜨리지 않고 사는 나무라 해서 제사상에도 늘 밤이 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니 이 나무를 베거나 뿌리째 뽑아서 거꾸로 세우고 험상궂은 얼굴을 새겨 놓는 것이다. 밤나무가 여의치 않으면 늘 푸른 기상을 가지며 여느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상적이었다.

메밀방죽옆 장생.
메밀방죽옆 장생.

 구설 속 장승

 2002년 탐진댐으로 수몰될 마을에서 문화제를 할 때 마을의 액막이를 위해서 소나무를 열심히 손질하던 목수께서 전해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며 서울의 장승백이(장승의 우두머리)란 곳에 100살 먹은 밤나무로 장승을 깎아 세웠는데 종교적인 이유로 곧장 전기톱으로 잘라버렸다던 1991년의 보도도 새삼 기억난다.

 이런 장승의 시련은 가루지기 타령에도 등장한다. 일하기 싫어하던 강쇠가 나무하기가 싫어서 장승을 뽑아서 옹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을 피워 버렸다. 이에 목신이 서울의 대장 장승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팔도의 장승들이 수문을 서면서 막고 있던 질병을 모조리 변강쇠에게 쏟아 버렸다. 장승에 부여된 신성을 모독함으로서 말미암아 죽어도 죽어지지 않는 시신이 되어 징치받는 상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느 시골 마을에도 있었던 장승은 그 영험함이 또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소도둑이 들어서 소를 끌고 가는데 밤새 걸어갔는데 결국 마을 당산나무나 장승 주변만 어슬렁 거려 잡혔다는 이야기다. 신성과 영험함이 동시에 부여되는 존재로서의 장승을 또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나무 장승이 전라도 주변에서 서서히 석장승으로 변화한다. 그 시기를 대부분 조선 숙종 무렵으로 이야기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적인 격랑중의 하나는 바로 중인들의 부각이라는 점도 이야기된다. 유교사회의 기존 질서는 전쟁중에 백성들에게 모순 투성이의 사회상임을 들켜 버렸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나는 왕이나, 관리, 토반들의 모습을 목도하며 백성 스스로 병장기를 만들거나 연장을 가지고 전장을 치렀던 것이다. 특히나 호남은 죽어야만 의병이라 할 정도로 모두가 힘을 보태며 전쟁의 보급로이자 진지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터이다. 향촌의 계급적 위계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와중에 상인으로 성장한 이들의 발언권이 조금씩 높아지며 이들이 사회에 공헌할 기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나무 장승을 석장승으로 바꾸는데 비용을 추렴할 때 기여하는 방식이었다.

인곡마을 감나무밭의 금표.
인곡마을 감나무밭의 금표.

 영원한 돌장승

 양반들이 가문의 사당과 서원에 힘쓸 무렵 중인들의 사회적 참여는 썩지 않는 영원한 돌장승을 만드는데 참여한 것이다. 물론 모든 석장승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장승은 사찰의 입구나 마을의 동구에 서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사찰주변이 현저히 많다.

 이렇게 1000여년전의 장생을 만났으니 이제 오늘날의 장승의 표준 모델을 찾아 뵙는 것이 예의다. 주말을 기다려 영암군 금정면 인곡마을로 간다. 마침 서울서 내려온 벗이 있어 산책을 겸해서 동행했다. 입석저수지를 끼고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대봉감의 주산지로 널리 알려진 인곡마을이다. 마을회관에서 감나무들이 열식된 계곡을 따라 가니 금표라고 쓴 바위가 보인다. 무언가를 금지하게 하는 것은 특히 벌목 같은 것에 대한 경고인 경우다.

왼편 나무외 키재기하는 선돌.
왼편 나무와 키재기하는 선돌.

 앞서 죽정마을에서 만난 건릉향탄 금표와 마찬가지다. 잠시 멈추어 보고 200여m를 들어가 차를 멈춘다. 이제 국사봉 산길을 따라 들어가는 게 순서다. 1km쯤 들어서면 쌍계사라는 절의 흔적이 있다. 여기에 두분의 장승이 계시다. 오솔길 같지만 잘 다듬어진 길이다. 영암과 장흥과 강진 세 개군이 연접한 봉우리가 국사봉이고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중 하나가 탐진강을 형성한다. 영암에서 월출산 다음으로 큰 산이 바로 국사봉이다. 등산객들이 많지 않지만 군에서 길을 잘 정비해서 운동 삼아 걷기에도 좋은 길이다.

반달모양 돌다리.
반달모양 돌다리.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고 개울을 건너야 하는 곳에 선돌이 하나 보인다. 우람한 크기의 선돌은 토템사상의 하나로 바위를 신성하게 여겼던 옛 선조들의 기림이다. 치솟은 선돌을 보며 절터로 가는 길, 개울을 건널 때마다 만나는 돌다리가 정겹다. 돌들이 많아서 돌다리를 이래 저래 배치한 것인데 이 절터에는 여섯 개의 돌다리를 만날 수 있다. 어떤 것은 오징어 게임할 때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무슨 의도가 있나 싶어지기도 하고, 무지개 다리로 만든 것은 나무가 뿌리를 내려 더 운치있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무를 그대로 두면 다리는 붕괴될 것 같아 안타까움도 동반한다.

할머니장승인 당장군.
할머니장승인 당장군.

 월출산이 돌 산이듯

 어쨌든 우리 일행은 두분의 장승과 조우한다. 제주에서도 한동안 일했던 벗은 돌하르방을 닮았다고 얘기한다. 벙거지를 쓴 제주의 하르방도 제주시내와 성읍쪽, 대정쪽이 각각 다른 형태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육지의 장승들도 나름 지역적 특색을 가진다. 쌍계사지의 장승은 모두 남성처럼 보이지만 사실 왼쪽은 여성이고 당장군이란 명문이 새겨져있으며, 오른편의 장승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주장군으로 남성성이 부여되어 있다. 무섭게 보여도 자세히 보면 옛적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이들의 명문이 주장군, 당장군인 이유를 나는 고인이 되신 강현구 선생님이 삼천리 금수강산은 질병 하나도 없었는데 중국 아미산에서 발병한 병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어 이를 물리치려면 중국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니 이름을 그리 명명한 것이라는 말씀을 철썩같이 기억하고 있다.

힐아버지 장승인 주장군.
힐아버지 장승인 주장군.

 하지만 양란을 겪은 민초들에게 중국 장군들이 들어와 활동했던 기억들이 이들에게 신격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아무래도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장승을 뒤로하고 몇발자국 가면 돌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 300여m 가니 당간지주가 나오고, 또 200여m를 가니 쌍계사의 절터가 나온다. 물길이 세갈래로 나눠지는 곳에 돌다리 세 개가 연이어 있고, 그중 하나는 무지개다리다.

 아기자기하게 돌을 쌓아올린 재치와 운치가 더해지는 돌다리를 보며 옛 선인들의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미학을 되새겨 본다. 석축만 남아있는 폐사지에 대나무숲이 우거져 더욱 스산해진다. 월출산이 돌산이듯, 지역 곳곳에 돌의 상징성을 삶으로 이어온 내력을 찾는 답사는 우선 여기에 그친다. 다음에는 다른 돌, 매향비를 찾아볼까 싶어진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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