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86) 남도숲의 보랏빛 위로, 천선과나무
한겨울 눈 속 보랏빛 열매 반짝여

천선과.
천선과.

 가을이 깊어가며 들과 산이 빛을 잃어갈 무렵, 대부분의 나무는 낙엽을 떨구고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한다. 하지만 남도 해안가의 어느 그늘진 숲길에 들어서면, 뜻밖에도 보랏빛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 군락이 있다. 잿빛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히 빛나는 보랏빛 열매들. 바로 천선과나무(天仙果木), 어릴 적 무던히도 배고팠을 때 따 먹었던 추억 어린 나무다. 가을 숲의 침묵 속에서 이 나무의 열매는 마치 잔잔한 미소처럼, 혹은 소리 없는 위로처럼 남아 계절의 끝을 향해 오는 이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천선과나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하늘(天)’과 ‘선녀(仙)’, 그리고 ‘열매(果)’가 결합된 이름에는 신비로운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다. 학명은 칼리카파 야포니카(Callicarpa japonica), ‘아름다운 열매를 가진 일본의 나무’라는 뜻을 지닌다. 실제로 그 열매는 한겨울에도 가지 끝에 또렷하게 남아 눈 속에서도 보랏빛으로 반짝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나무를 ‘보랏빛 구슬나무’, ‘자주열매나무’라고도 불렀다.

천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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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선과나무는 마편초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떨기나무로, 바닷가 산지에서 높이 2~4m 정도로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잎끝은 부드럽게 뾰족하고 밑은 원형 또는 심장 모양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암수딴그루로서 5~6월에 새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꽃자루가 자라며, 끝에 3개의 꽃싸개잎이 달린다. 꽃은 꽃주머니에 싸여 있어 눈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나무의 진정한 매력은 꽃이 아니라 열매에 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초록 잎은 노랗게 바래고, 그 자리에 구슬처럼 맺힌 자주색 열매들이 빽빽하게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경상남도, 전라남도, 남해안 섬 지역과 제주도에서 자생하며, 일본 혼슈 이남, 타이완, 베트남, 중국 남부 등지에도 분포한다.

 천선과나무는 생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열매가 익는 시기인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많은 나무들이 먹이를 내주지 못할 때, 천선과나무는 새들에게 귀한 양식을 제공한다. 직박구리, 멧비둘기, 산비둘기 등이 이 자주빛 열매를 즐겨 먹으며, 씨앗은 새의 배를 거쳐 다시 숲으로 흩어진다. 한 그루의 천선과나무가 다음 해 남도 숲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다리가 되는 셈이다.

 모든 생명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천선과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의 번식에는 천선과좀벌(Blastophaga nipponica)이라는 작은 곤충이 깊이 관여한다. 두 생명은 서로의 삶을 완성시키는 정교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 봄이 되면 암컷 천선과좀벌은 천선과나무의 꽃자루 끝에 생긴 화구(花毬) 속으로 들어가 산란을 시작한다. 이때 벌의 몸에 묻은 꽃가루가 암꽃에 옮겨져 수정이 이루어진다. 이후 열매 속에서 부화한 유충은 내부에서 성장하여 성충이 된다. 먼저 깨어난 수컷벌은 같은 열매 속의 암컷벌과 교미한 뒤, 열매의 벽에 구멍을 뚫어 암컷이 밖으로 나갈 통로를 만든다. 그리고 수컷벌은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천선과.
천선과.

 곧 이어 암컷벌들이 구멍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이 태어난 화구와는 다른 어린 화구를 찾아 날아간다. 이때 이전 세대의 꽃가루를 몸에 묻힌 채 이동하기 때문에 새로운 화구의 수분이 이루어진다. 한 그루의 천선과나무에는 수많은 화구가 열리지만, 그 속에서는 늘 이런 순환이 반복된다. 나무는 벌에게 서식과 번식의 공간을 내어주고, 벌은 나무의 수정을 도와 다음 세대를 잇는다. 서로의 생명을 이어주는 완벽한 공생의 고리, 이 미세한 생태적 관계 속에 자연의 정교한 조화와 순환의 법칙이 담겨 있다.

 천선과좀벌이 없는 천선과나무는 결실하지 못하고, 천선과나무가 없는 벌 역시 생존할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선과좀벌 암컷이 천선과나무의 암꽃과 수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벌이 암꽃을 피하고 수꽃만 찾아간다면, 천선과나무 암그루는 결실하지 못해 종 전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 덕분에 생명은 유지된다. 구별할 수 없기에, 그들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 함께 살아남았다. 자연은 언제나 완벽보다 균형을 택한다.

천선과.
천선과.

 천선과나무는 한반도의 남부와 중부, 특히 따뜻하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수종이다. 그러나 최근 급격히 변하는 기후로 인해 여름철의 고온과 가뭄, 봄철 이상저온이 번식과 결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심 녹지나 산림 가장자리에서 개체 수가 줄어드는 현상도 보고된다.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작은 나무의 위기는 우리 숲 생태계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천선과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연은 거창한 언어로 경고하지 않는다. 다만 색으로, 빛으로, 침묵 속의 생명으로 말한다. 한겨울의 숲에서 자줏빛 열매가 유난히 또렷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만큼 자연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 숲길을 걸으며 천선과나무를 만난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춰보자. 그 작은 열매 한 알 안에는 천선과좀벌과 함께 사계절을 견뎌낸 인내, 생명을 잇는 연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다정한 위로가 깃들어 있다. 그것이 하늘이 내려준 선물, 천선과(天仙果)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천선과.
천선과.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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