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83)가을 장마속 붉은 열매, 후피향나무
잎이나 수피서 은은향 나 붙여진 이름

후피향나무 열매.
후피향나무 열매.

 아침과 저녁 기온이 쌀쌀해진 초가을, 남도 지방에는 이례적으로 9월 한 달 내내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 장마는 6~7월에 끝나지만 올해는 가을에 장마가 이어지면서 벼 농사는 물론 들과 숲의 식물들까지 긴장 상태이다. 이 시기에 식물들은 열매를 성숙시키기 위해 비바람을 견디며 전략을 세운다. 남도의 해안숲이나 도심내 조경수로 심어진 후피향나무는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 비바람 속에서도 빨간 열매를 맺으며 종자 결실에 정성을 다한다. 이 식물은 일부 개체가 수꽃만 피우고 다른 개체가 양성화를 피우는 수꽃 양성화 딴그루라서 근친교배를 피하고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날씨가 맞지 않으면 결실이 좌우될 수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도 인간도 예외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후피향나무(厚皮香)는 나무의 특징이 오롯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한자 후(厚)와 피(皮)는 ‘두꺼운 껍질’을, 향(香)은 ‘향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후피향나무는 흑갈색의 두툼한 수피가 불규칙하게 갈라져 있으며 잎이나 수피에서 은은한 향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에서는 후피향나무를 ‘가메기조록낭’(제주 방언)이나 ‘목곡’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마을 주변에 심어 해풍을 막고 그늘을 제공했다. 또한 이 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수로, 학명은 턴스트로미아 짐난데라(Ternstroemia gymnanthera)이다. 학명의 속명 턴스트로미아(Ternstroemia)는 1748년에 사망한 린네의 제자이자 스웨덴 식물학자 크리스토퍼 턴스트로엠(Christopher Ternstroem)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필자는 이 나무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식물 이름은 금세 기억나지만, 후피향나무만은 한자어인 데다 흔히 볼 수 없는 상록수라 종종 잊곤 한 나무이다.

후피향나무 꽃.
후피향나무 꽃.

 생태적 특징은 산기슭에서 자라는 상록 활엽 큰키나무로 높이 15m에 달한다. 나무껍질은 옅은 회갈색이며 잔가지에 털이 많다. 잎은 어긋나지만 가지 끝에 서너 장씩 모여 나는 것처럼 보인다. 잎 가장자리는 톱니가 없으며 앞면은 짙은 녹색, 뒷면은 황록색이다. 잎자루는 붉은색을 띠고, 6∼7월 잎겨드랑이에서 연노란색 꽃이 아래로 처져 핀다. 꽃이 화려하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봄과 초여름 사이에 향기로운 꽃이 피고, 가을에는 둥근 열매가 붉게 익어 껍질이 갈라지면서 주홍색 씨앗이 드러난다. 우리나라 전라남도 보길도, 제주도 등에 자생하며, 네팔, 타이완,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한다. 우리나라 상록성 차나무과 식물 중에서 열매가 익어도 벌어지지 않는 점에서 비쭈기나무와 유사하지만, 비쭈기나무에 비해 겨울눈이 비늘조각으로 싸여 있어 쉽게 구분된다. 정원수로 심으며, 목재는 건축재, 가구재로, 나무껍질은 다갈색 염료로 쓰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후피향나무는 일본에서 삼대 정원수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난대림이나 해안 지역의 조경수로 널리 식재된다. 가지가 층층이 퍼져 균형 잡힌 수형을 이루기 때문에 담장 대신 생울타리로 이용하기 좋고, 특히 해풍과 염분에 강해 해안가 마을의 방풍림으로 식재하고 있다. 또한 상록수여서 사시사철 푸른 잎을 감상할 수 있고, 잎의 색 변화가 있어 계절감을 느끼게 한다. 한방에서는 후피향나무의 두꺼운 수피와 잎에서 나는 향기를 이용해 방향제로 삼거나, 민간요법에서 약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는 두툼한 껍질과 잎에서 추출한 기름이 방향제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열매 또한 한약재로 이용된다고 전해진다.

후피향나무 꽃.
후피향나무 꽃.

 후피향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선호하지만 염분과 건조, 바닷바람에 강해 해안성 기후에 잘 적응한다. 이 때문에 남해안과 제주도의 난대림에서 동백나무·후박나무 등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해풍과 폭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 기후변화로 전남 신안군 증도에 위치한 한반도생태숲처럼 해안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어, 이런 상록수의 회복력과 적응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도심에서는 가로수나 화단의 조경수, 농촌과 어촌에서는 방풍림으로 활용해 바닷바람을 막고, 해안 생태계의 안정성을 높이기도 한다. 또한 사계절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하며, 향기로운 잎과 열매는 사람들에게 자연의 풍요로움을 알리는 고마운 존재다.

 이제 가을 장마 속에서도 빨간 열매를 맺는 후피향나무는 남도 지방의 자연과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든든한 친구이다. 두꺼운 껍질과 은은한 향, 해풍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돕는 생태적 가치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남도의 숲길이나 도심 공원에서 이 나무를 만난다면, 그 향기 속에 깃든 자연의 지혜를 한 번 더 떠올려 보는 추석 한가위를 맞이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후피향나무 새순.
후피향나무 새순.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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