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72) 빼앗긴 봄, 흑산도비비추
흑산도·홍도에 자생해 붙여진 이름
짧아진 봄이 훌쩍 지나고 성큼 여름이 다가온다. 이 계절에는 흑산도와 영산도, 장도에 흑산도비비추가 꽃대를 높이 올리느라고 무척 애를 쓴다. 게다가 보랏빛 작은 나팔꽃이 차례대로 피어나 벌과 나비에게 손짓하며 유혹하고 있다. 반짝거리는 녹색 잎은 손바닥 크기만 해서 싱그럽고 탐스럽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이곳저곳에 보랏빛 물결이 일렁이고 꽃향기가 그윽하다. 누구라도 보랏빛 꽃에 탐스러운 녹색 잎을 들여다보면 저절로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저 온종일 꽃숲에서 놀아도 지치지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충만해지는 듯하다. 꽃을 따라 걷는 동안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마저 든다.
흑산도비비추는 이름 그대로 흑산도와 홍도에 자생하는 비비추라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인터넷을 살펴보니 기본종 비비추는 잎이 꼬여서 ‘비비’ 어린잎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취’가 합쳐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왠지 그럴듯해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1980년대 말, 미국 식물학자 베리 잉거(Barry Yinger)가 전남 홍도에서 이 식물을 채집해 1993년 ‘호스타 잉게리(Hosta yingeri)’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보고한 일화는 흑산도비비추가 갖는 특별함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식물은 ‘홍도비비추’, ‘잉거비비추’라고도 불린다. 흑산도비비추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 Ⅳ등급에 해당하며, 한정된 지역에만 분포하는 귀한 고유종이다.
생태적 특징은 산지 숲속의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15cm 정도로 작다. 잎은 광택이 나고, 상록성으로 늘 푸르다. 잎자루는 V자형의 홈이 있고 녹색이며 자색 반점이 약간 있다. 꽃은 8~9월에 피며 옅은 보라색이다. 수술은 6개인데, 3개는 짧고 3개는 길다. 열매는 검정색으로 익는다. 이 종은 꽃차례에 붙는 꽃싸개잎 조각이 녹색으로 개화 및 결실기에도 남아 있으며, 꽃자루는 둥글고, 꽃차례에 꽃이 빙글빙글 돌면서 핀다는 점이 다른 비비추 꽃과 다르다. 작고 수수하지만 그 속에 담긴 섬세함과 단아함은 자연이 만든 예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흑산도비비추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종이다. 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흑산도, 소흑산도, 홍도 등 일부 섬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분포한다. 현재 한국적색목록에서는 ‘미평가종(NE)’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국외반출 승인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어 잎 하나라도 허가 없이 외국으로 반출할 수 없다. 이는 곧 흑산도비비추가 우리 생물주권을 상징하는 식물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귀한 식물도 역사 속 아픈 사연을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물학적 기반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탓에 우리 고유종이 무단으로 수집되어 해외로 반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비교적 최근에도 해외 식물 수집가들의 채취로 인해 우리 고유 자원이 외국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되거나 상품화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흑산도비비추 또한 그 피해자 중 하나다. 남도의 조용한 섬마을에서 자라던 풀꽃이 어느 날 외국 원예품종으로 되어버린 현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긴다.
국제사회는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생물다양성협약(CBD)’을 체결하고, 각국의 고유 생물자원을 보호하고 무단 반출을 금지하는 강력한 규제를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에 발맞춰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 생물주권을 지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지역의 고유종은 단순한 생태자원을 넘어, 그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까지 함께 담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도의 흑산도비비추처럼, 지역에서 소중히 가꾼 생명들이야말로 지구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다.
흑산도비비추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지역에서 먼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결국 지구 전체에서도 그 가치를 지켜낼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랏빛 꽃송이를 바라보며 우리는 알게 된다. 이 땅에 뿌리내린 작은 생명 하나하나가 소중하며, 그것을 지키는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생명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의 삶과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글·사진=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한국환경생태학회 부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