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76) 장마와 폭염 속 그늘, 자귀나무
가지마다 피어난 분홍색 꽃 실크 부채같아

자귀나무.
자귀나무.

 장마 끝자락, 후끈한 습기가 뺨에 달라붙는 날. 그런 날이면 공원 한편에서 조용히 피어난 자귀나무가 눈길을 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 속에서도 공원 가장자리 자귀나무 아래에 들어서면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가지마다 피어난 분홍색 꽃들은 마치 실크 부채를 펼쳐 놓은 듯하고, 그 아래 드리운 그늘은 녹빛 우산처럼 시원한 안식처가 되어 준다. 은은한 꽃향기가 습도를 뚫고 퍼져 나와 달아오른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다. 쏟아지는 햇살에도 자귀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연이 주는 작은 위로를 느낀다.

자귀나무.
자귀나무.

 자귀나무는 밤만 되면 잎이 포개지는 모습에서 ‘잠자는 일에는 귀신’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를 깎아 다듬는 연장인 자귀의 손잡이로 쓰는 나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낮에 잎을 펼치고 밤에는 다물어 수분 증발을 줄이고 휴식하는 모습 때문에 합환목, 합혼목, 합혼수, 야합수라고도 한다. 이러한 별칭 덕분에 예로부터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의미로 합환주를 신랑신부가 나눠 먹는 풍습이 생겼다. 또한, 집집마다 자귀나무를 심었는데 목재를 기구재로 이용하거나 나무 껍질과 꽃을 약용한다. 그 외에도 잎을 소가 잘 먹는다고 하여 소쌀밥나무 또는 소쌀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자귀나무는 예로부터 사람이나 동물들 곁에서 자라며, 쉼과 실용을 함께 전해주는 나무였다.

자귀나무.
자귀나무.

 생태적 특징은 콩과에 속하는 관속식물이다. 해가 잘 비추는 숲 가장자리나 산기슭에서 자라거나 공원에 조경수로 식재하는 작은 큰키나무 또는 큰키나무이다. 줄기는 가지가 넓게 퍼지며, 높이 5~15m 정도로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밤에 접힌다. 꽃은 6~7월에 피는데 가지 끝에서 난 길이 3~4cm의 꽃대 끝에는 붉은 머리꽃들이 모여 피어나며, 그 안에 20~30개의 분홍빛 수술이 부드럽게 퍼져 있다. 열매는 콩 모양으로 9~10월에 익으며, 씨가 7~15개씩 들어 있다. 이 종은 황해도 이남의 산기슭과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고 북반구 열대- 온대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자귀나무보다 잎이 크고 꽃이 백색인 왕자귀나무는 목포 유달산 및 인근도서에 자생하는 낙엽활엽 소교목으로 구별된다.

자귀나무.
자귀나무.

 요즘처럼 장마와 폭염이 이어지는 날씨 속에서, 습도 높은 폭염일수와 열대야일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기상청 자료(https://data.kma.go.kr)에 따르면, 광주광역시의 폭염일수는 지난 30년간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2024년에는 무려 37일을 기록했다. 열대야일수도 같은 해 37일에 달해, 전국 평균보다 4~7일 더 많았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도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도심 내 불투수면(아스팔트, 콘크리트 등) 면적이 늘고, 산림면적이 줄어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인 대안으로는 ‘백만평광주숲’과 같은 도시의 녹지공간을 확대하고, 보호지역을 늘려가는 일이 시급하다. 하지만 우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까운 도시공원이나 아파트 숲에 자귀나무처럼 친근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작고 소박한 그늘 하나가 삶의 온도를 조금은 낮춰줄 수 있을 테니.

자귀나무.
자귀나무.

 실제로 광주 푸른길 공원 산책로를 따라 느티나무, 단풍나무와 함께 자귀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한여름에 분홍 꽃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또한 무등산국립공원 자락아래 광주호수생태원이나 동네 작은 공원 가장자리에도 이국적인 자태의 자귀나무가 서 있어, 시민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한낮의 뜨거움을 달래주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 나무 그늘 아래의 온도는 맨발로 햇볕에 달궈진 도로 위보다 평균 3도 이상 낮다는 관측 결과도 있다. 실제로 기상청은 폭염 시에는 ‘그늘이나 녹지에서 자주 휴식하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도시 속 자연 그늘이 열기를 식혀주는 천연 피난처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빛을 한껏 머금은 자귀나무도 자신의 그늘 아래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한결 선선한 바람을 선물한다. 분홍 꽃무리 사이로 반짝이는 파랑새 한 마리, 느릿하게 흔들리는 잎새 그림자까지, 자귀나무 그늘 아래에서 일상의 속도도 한 템포 느려진다.

자귀나무.
자귀나무.

 이제 올여름,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연의 시간을 따라 걸어보자. 숨 막히는 더위에 지칠 때면, 이웃한 공원이나 광주호수생태원의 자귀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쏟아지는 햇빛을 잎사귀 가득 받아내고 만들어진 그늘 속에서, 뺨을 스치는 바람과 은은한 꽃향기를 느끼다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에 시원한 쉼표 하나가 찍힐 것이다. 삭막한 콘크리트 도시 한복판에서도 자연은 이렇게 우리에게 조용히 손을 내민다. 폭염 속에서도 묵묵히 꽃을 피워내는 자귀나무처럼, 우리도 잠시 자연의 품에 기대어 삶의 작은 기쁨을 만끽해보자. 분홍빛 그늘 아래에서 맞이하는 한낮의 휴식이, 올여름 당신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바쁨과 더위로부터 멀어진 그 순간, 자귀나무는 말없이 그늘을 내어 줄 것이다.

자귀나무.
자귀나무.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국가표준식물목록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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