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페미니즘’추천도서 4권

 지난 해,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설문조사 하나를 지켜본 적이 있었다. 패널 위에 스티커를 붙여서 대중들의 뜻을 읽어내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였다.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망설이다가 “페미니스트가 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다”고 설명하자, 그제야 그들은 ‘예’에 스티커를 붙였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던 작년과 달리, 최근에는 ‘페미니즘’이야말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됐다.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총성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주변인이 겪어왔던 경험을 토대로 ‘여성혐오’의 폭력성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혐오란 여성을 숭배하거나 멸시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빼앗기는 구조적 현상을 뜻한다. 여성혐오를 인식하는 일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이 일은 마치 평생 동안 걸쳐왔던 색안경을 벗어내는 작업과 같다. 처음에는 이전과 달라 보이는 세상에 혼란이 오겠지만, 지금껏 살아가며 마주쳤던 폭력적인 상황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라는 구조에 있다.

 막 색안경을 벗어 던질 결심을 했다면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될 듯하다.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핫(hot)’한 책 네 권을 소개해볼까 한다. 소개하려는 책들은 기초지식이 별로 없더라도 ‘여성혐오’에 대한 막연한 직관만 있다면,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말랑말랑하다. 소개할 책들은 기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선택의 결과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매우 유익하리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채록/정희진 해제)

 2016년 5월17일 새벽 1시. 서울 서초동의 상가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이후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이 포스트잇 추모를 벌였다. 이후 우천 예보로 인한 훼손 우려로 자료 보존을 위한 철거가 계획됐고, 철거 직전 22일 밤 ‘경향신문’에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포스트잇을 일일이 촬영해 기록을 남겼다. 이후 그들은 기록을 바탕으로 1004개의 텍스트로 정리했다.

 경향신문은 “이런 아카이빙 작업이 이번 사건을 통해 불거진 우리사회를 성찰하면서 변화시키는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사건은 시민, 그리고 여성들에게 상흔에 가까운 충격과 공감, 추모, 공포 등을 남겼다. 경향이 “이번 사건을 통해 시민들, 특히 여성들이 이 사건에서 ‘여성혐오’를 찾았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말하듯, 당시의 포스트잇 기록은 사건과 마주한 시민들의 집단적 성찰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이야말로 강남역 10번 출구로 시작된 파장이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한 중요한 기록물이다. 수많은 포스트잇 중 몇 가지를 남긴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인식하지 못하는 /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 “‘오빠가’ ‘남자가’ 지켜주는 사회는 필요 없습니다. / 여자 혼자여도 안전한 사회가 필요합니다.” “너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칼끝이 향한 곳은 분명한데 / 어떻게 눈먼 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작자 이민경)

 “왜 쓰게 되었는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많은 이가 그랬듯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저는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사회과학분야 ‘여성학/젠더’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한 바로 그 책, 최근 20대 여성들에게 가장 열띤 호응을 받은 바로 그 책이다. 저자는 서두에 앞서 책을 쓰게 된 이유가 ‘강남역 살인사건’이었다고 고백한다. 작자는 사건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과 여성혐오를 주제로 타인을 설득·논쟁할 일이 잦아지자, ‘어떻게 논쟁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책으로 담아냈다.

 이 책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는 ‘이론서’가 아니라, 여성혐오성 발언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실전서’라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책의 절반이 ‘내 입장 정리하기’, ‘상대의 입장 파악하기’, ‘단호함을 가지기’ 등 대화를 하며 받을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채워져 있다. 후반부에는 여성혐오에 대한 직관은 있으나 발화하기 어려울 시민들을 위해, 여성혐오성 발언 사례와 알맞은 대답 예시를 작성해 놨다. 악의적이거나 무지한 여성혐오 발화에 대해 ‘친절히’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과 피로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초반에, ‘뭘 또 이렇게까지’ 해도 된다고 힘주어 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민해?’라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말의 힘이 꽤 크더라는 말도 그래서입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말의 큰 힘에 압도되기 쉽지만,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의 목소리, 혹은 당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타인의 목소리뿐입니다. (p.76)”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지음/노지양 옮김)

 우리는 남녀평등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머뭇대고는 한다. 저자 역시 “아직도 가끔 내가 페미니스트라 규정되면 멈칫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인신공격처럼 들리기도 하며, 한편으론 모든 것을 다 갖고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종류의 남녀불평등에 대해 격렬하게 싸우기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며 “자신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지만,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 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과 무게감을 망설임 없이 내던지는 일에 앞장선다.

 특히나 소설가인 록산은 미국에서 유행한 음악, 영화, 책, 연예계 등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혐오 코드를 읽어내는 데 탁월함을 보인다. 한국의 광고 음악으로 삽입됐던 ‘블러드 라인’부터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노예 12년’ 등 다양한 장르가 어떤 방식으로 여성혐오를 재생산 했는지에 대해, 자신의 삶과 경험을 빗대어가며 비판하고 있다.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리뷰를 따라가다 보면 미국 대중문화의 여성혐오 방식이 한국과 별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김명남 옮김)

 이 책은 현장 운동가 리비카 솔닛이 ‘톰디스패치’ 블로그, ‘파이낸셜 타임즈’, ‘지지버 매거진’ 등 앞서 발표한 여러 단문을 엮은 책이다. 수록된 글 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년)’는 파티에서 만난 한 남성이 레비카 솔릿과 대화를 하다가 ‘최근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며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으나, 사실 그 ’아주 중요한 책’이라 함은 솔릿이 가장 최근에 집필했던 저서였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에서 시작한다.

 여성이 해당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을 원천에 차단하는 것, 즉 여성이 주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온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솔릿은 “여자들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고 설명했다. 해당 글이 게재된 이후, 미국에서는 ‘학계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웹사이트를 통해 수백 명의 여자들의 증언으로 ‘맨스플레인’은 중요한 ‘가부장제 현상’이 됐다.

 이 외에도 여성혐오 폭력과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통제 하는지, 평등결혼(동성결혼)이 가부장제를 어떻게 약화시키는지, 사회가 여성의 목소리에 신뢰성을 어떤 방식으로 빼앗아가는지 등에 대한 솔릿의 주옥같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또한 강남역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캘리포니아 주 아일라비스타 살해 사건(2014년)’에 대한 반응과 해석을 정리하고 있다.

양유진 기자 seoyj@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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