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으로 형성해낸 ‘대한민국’
칠판에 주제어 제시…근현대사 쭈욱 짚어

▲ 연극 ‘냉면’. 경숙은 생전에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고생으로 일관하다 삶을 마감한 어머니가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물냉면 한 그릇을 다정히 나누는 모습을 보며 백석의 시 ‘국수’를 판소리 가락으로 노래한다.
 무대엔 벽이 하나 세워져 있다. 벽 왼쪽에 조그만 칠판 하나가 조명을 받고 있다. 작은 극장에 관객들은 포화상태다. 극이 시작되면 실크 햇을 쓴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실크 햇에서 쪽지를 꺼낸다. 생쥐나 비둘기는 쉽게 넘어 다니지만 사람은 쉽게 넘어 다니지 못하는 끔찍한 이것이라고 한다. 그 종이에는 ‘분단’이라고 단어가 적혀 있다.

 7월19일, 극단 ‘난희’의 ‘냉면’이라는 공연을 보러 서울에 갔다. 연극인들의 세 번째 ‘권리장전 페스티벌’에 참가한 총 11개의 작품 중 두 번째 작품이다. ‘권리장전’은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반기를 들며 2016년에 시작됐다. 2016년에는 ‘검열각하’, 2017년에는 ‘국가본색’, 이번 2018년 주제는 ‘분단국가’이다.

 연극 ‘냉면’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침향외전’이다. ‘침향’은 ‘냉면’의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극단 ‘난희’를 만든 김명화의 작품인데, 2008년에 공연됐다. ‘침향’으로부터 10년이 흘렀다. 10년 사이에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종전국가로 모습을 바꾸려 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침향’은 ‘냉면’에 끼어든다. 그렇다고 ‘침향’을 알아야 ‘냉면’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분단국가에서 종전국가로

 처음부터 홀로 조명을 받으며 관객을 맞았던 칠판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우들은 이 칠판에 주제어를 적어 가며 연극을 만들어 나간다. 극은 다큐멘터리인가 싶게 한국 근현대사를 죽 짚어 나간다. 순간 관객들은 작가(김명화)역을 하는 배우(서영화)의 학생들이 되어 연극을 따라간다. 나이 드신 분들도 있고 젊은 축들도 있다. 각각 어떤 심정으로 이 수업(연극)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진짜 수업처럼 하품을 하며 졸려 하는 관객도 있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극을 보다 보니 이 연극은 참 ‘지적인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방송국에서 ‘분단’이나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라는 부제를 달고 이 연극을 부탁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영향력 있는 방송국에서 이 연극을 내보내면 파급력이 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수업이되 딱딱하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이모를 연극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모를 리얼 소스로 만들었던 ‘침향’의 애숙과 ‘냉면’의 이모가 겹쳐지고 애숙과 이모는 둘 다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애숙은 잠깐 선을 넘었던 남편을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이모는 북으로 간 남편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온통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냉면’에서는 당연히 냉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진짜 작가가 ‘권리장전’에서 공연할 작품을 구상하다가 소재로 잡은 것이 냉면이다. 분단국가이자 종전국가가 되려고 하는 대한민국을 냉면을 중심으로 잘 형성해내었다. 백석의 시 ‘국수’와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만나야 하고 만나고 싶으나 만나기 힘들어진 사람들을 위한 오브제로 충분히 활용되었다. 관객들(학생들?^^)은 같이 아프고 그래서 분위기는 숙연해진다.
연극 ‘냉면’ 중.|||||

 ‘침향’의 애숙과 ‘냉면’에 나오는 작가의 어머니(월북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이모의 동생)는 치매에 걸린다. 작가가 어떤 캐릭터를 형상화할 때는 연극적 의도가 숨어 있을 터. 하필 치매일까. 이것은 기억에 관한 연극인가. 처절하고 지난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그 기억을 지우는, 혹은 아예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가. 치매에 걸려서 일정 기간의 기억이 없지만 한 지점에 있는 특별한 기억은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숙이 그렇고 이모가 그렇고 작가도 그렇고 어쩌면 관객들 중 누군가도 그렇다.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에 미리 족쇄를 채우는 것은 누가 봐도 마땅치 않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다. 다 잊어버린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그것.
 
▲남자 둘·여자 셋 일등공신 배우들 

 연극 ‘냉면’의 칠판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신기루’다. 북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 없는 이모부와 그 이모부를 기다리다가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운명한 이모가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뿐인 딸 경숙(작가의 사촌 언니)이 대접하는 냉면을 맛있게 먹는다. 경숙은 생전에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고생으로 일관하다 삶을 마감한 어머니가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물냉면 한 그릇을 다정히 나누는 모습을 보며 백석의 시 ‘국수’를 판소리 가락으로 노래한다. 기껏 참았던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게 흐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거늘. 사랑하고, 손잡고 함께 길을 걷고, 한 그릇 맛있는 음식으로 더위를 같이 이기고.

 이 연극에 일등공신은 배우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신선한 극형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나치게 지적이어서 좀 생경하고 연극으로서 좀 그랬다는 사람들도 있었던 이 극에서 최고의 몰입감과 재미를 부여한 것은 남자 둘, 여자 셋으로 이루어진 배우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연극을 살린 건 관객들이었다. 한 나이 드신 어르신(73세)은 젊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많이 보고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은 이 연극이 ‘소중한 그 무엇’에 대한 그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제3세대’에 비유된 젊은 관객들은 ‘소중한 그 무엇’에 관해서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잊지 말자. 우리의 전쟁, 우리의 분단, 우리의 근원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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