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감도의 세계에서 오감도의 세계로

▲ 이상.
 烏瞰圖(오감도)
 詩第一號(시제1호)
 
 十三人(13인)의兒孩(아해)가道路(도로)로疾走(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적당)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시 ‘오감도 시 제1호’다. 그의 대표적인 시다(소설로서 대표작은 ‘날개’다).
 이상은 애초 오감도를 30회 연재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연재되다가, 독자들의 비난과 항의로 30회를 채우지 못하고 15회로 중단됐다. 위의 시 ‘오감도 시 제1호’는 그 15편 중 첫 번째로 실렸던 시다.
 당시 이상이 발표한 작품들은 현대 독자들이 보더라도 난해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선과 도형까지 등장하며, 아라비아숫자를 사방좌우 뒤집어놓은 모양의 기호까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것들이었다.
 급기야 독자들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고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같은 비난과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오감도’ 연재는 중단되고 만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 지면에 발표된‘오감도 시제1호’.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하느냐”
 
 이에 대해 이상은 ‘오감도 작가의 말’이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독자들을 나무랐다. 오감도를 중단시킨 사회적 압력에 항거한 것이다. 오감도 연재를 중단한 직후인 1934년 8월의 글이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물론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내 시를 이해 못 할 정도로)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1931년~1932년간에 쓴) 2천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 용대가리를 떡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깜빡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 데는 절한다.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우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이상문학전집3, p.353)
 
 이 시를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접했다. 내 느낌은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는 오감도 첫 독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것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서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왜 이런 시를 교과서에까지 실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저런 의문은 관두더라도 일단 시에 대한 이해 자체가 되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그 시절의 나로서는 이상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와 시절을 탓한다 하더라도, 이상의 꾸지람대로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낸’ 독자로서의 의무방기에 대해서도 뉘우쳐 보아야 할 것이었다.
 문득 ‘그렇다면 이상이 시를 발표하던 시절의 국내 독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건체제의 생활과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과 온갖 ‘19세기’를 폐기하고 시대를 앞서가고자 했던 이상과의 사이에는 꿈에서도 메꿔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으리라.
 사실 오감도의 첫 번째 시가 지면에 발표되기 전부터 문제가 터졌었다. 바로 오감도(烏瞰圖)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신문사의 문선공(인쇄소에서, 원고대로 활자를 골라 뽑는 사람)이 ‘烏瞰圖’(오감도) 대신 ‘鳥瞰圖’(조감도)로 채자를 해서 보내자 교정부에서는 다시 ‘烏’(까마귀 오)자로 바로잡고, 이를 다시 문선공이 ‘鳥’(새 조)자로 뽑아 보내자 또 교정부에서는 ‘烏’로 수정자를 내보냈다. ‘烏瞰圖’라는 말이 사전에도 없는 단어라 문선공이 그와 비슷한 용어인 ‘鳥瞰圖’의 오자로 짐작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김윤식, 1997)
 조감도는 높은 곳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상태의 그림이나 지도를 뜻하는 용어다. 영어에서는 ‘bird’s-eye view’라고도 한다. 총독부 건축기사 출신이면서 화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했던 이상은 ‘鳥’에서 획 하나를 빼 ‘烏’로 바꿈으로써, 자신에게 익숙한 조감도라는 용어를 오감도라는 신조어로 교묘하게 환치시킨 것이다.
 
 ▲인간 근원에 접근했을때의 무서움
 
이상문학전집, 문학사상사, 1989-1995.

 이상 문학 연구의 대가인 이어령 교수는 이에 대해 “까마귀와 같은 눈(까마귀는 검기 때문에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으로 인간들의 삶을 굽어본다는 뜻이며, 암울하고 불길한 시적 분위기를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이 시에서 인간 삶을 바라보는 까마귀는 작가 자신을 터이다.
 이처럼 이 시는 제목부터 문제적이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본문 첫 단어부터 또 다른 암초가 등장한다. 이상은 대체 무슨 뜻으로 ‘13인’이라고 했느냐 하는 의문이다.
 ‘13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동안 비평가와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예수와 12제자, 위기에 직면한 인류, 무수한 사람, 해체된 자아의 분신, 당시의 13도, 시계 시간(12)의 부정으로 시간의 불가사의를 희화화한 것, ‘13일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의 상징, 이상 자신의 기호(따라서 의미를 따져봐야 무의미한 것), 성적 상징, 원시적 자아로의 분화 등이 그것들이다.
 그뿐 아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시어, 표현 하나하나에 무수한 해석이 달렸고 또 달리고 있다. 예를 들어 ‘도로로질주하오’의 의미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태초부터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과 도로라는 역사적 도정을 표시하는 은유, 불안의 극단적 형태 혹은 성적 흥분, 현대의 위기의식, 성행위, 공포로부터의 도피 등이 그것들이다.
 해석이라면 시보다는 쉬어야 하련만, 이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26년 7개월을 살다 간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은 후대의 문학가와 연구자들에게 수많은 어려운 숙제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용대가리’는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라는 문장이었다.
 이에 대해 비평가 김윤식은 “사람들은 오감도 제1호를 두고 난해하다고 외치면서 이런저런 해석에 골머리를 앓았고 또 앓고 있지만, 정작 핵심적인 것은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의 표정에 있다. ‘인간고의 근원’에 접근했을 때의 그 무서움,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의 몸부림, 그것이 이른바 ‘오감도’의 세계다”라고 했다.(김윤식, 2005)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들(13인의 아이)의 질주는 공포 그 자체의 표상이자, 공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실존적 운명으로 인한 공포인 동시에 그러한 공포에 대한 반항의 시도이다”라고 했다.(김윤식, 1997)
 위 인용문에 나오는 ‘인간고의 근원’ ‘죽음이라는 운명’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 곧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존재조건일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사람이기에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20대 초반에 불치병인 결핵으로 각혈을 시작했던,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식민지 근대 조선이 낳은 불우한 작가 이상의 ‘삶’에 대입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펜이 아니라 피로 쓴 작품들
 
 이상(李箱)은 본명이 김해경(1910~37)이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백부(큰아버지)의 집으로 옮겨 1932년 백부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1927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경성고공은 서울 공대의 전신으로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의 하나로 설립된 고등 기술학교였다. 이곳에서 3년간 이상은 건축설계와 기술을 익히는데, 이것은 훗날 숫자와 기하로 구성된 이상의 난해한 시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상은 고공을 졸업한 직후인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가 되고 이듬해인 1930년에는 총독부 관방 회계과로 전임됐는데, 1933년 사표를 내고 만다. 1929년 첫 징후를 보인 폐결핵이 1931년에는 꽤 심각하게 진행되고 1차 각혈까지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이상의 건강은 물론, 가족과 일상, 환경은 급격하게 허물어져갔다. 반면 이상의 예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상 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김윤식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주목해야 한다.
 “이상 문학의 원점에는 결핵에 의한 죽음의 공포가 놓여 있다고 지적된다. 즉 그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필사적으로 극복하려는 정신적 노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김윤식, 1997).
 하지만 오감도 시 제1호 해석을 위해 인용한 ‘죽음이라는 운명’ ‘인간고의 근원’을 곧 ‘결핵에 의한 죽음의 공포’와 같은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수많은 연구자의 또 다른 해석들이 있고 또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상이 기존의 시에 대한 인습과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또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세계에 대해 철저히 조롱하면서, 새로운 어떤 것을 확립하려는 절실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그런 노력이 100편 안팎의 시와 16편의 소설, 그리고 다수의 수필로 남겨졌다. 한글로 쓴 작품들도 있지만 일본어로 된 것들도 많다. 심지어 숫자와, 선, 도형 등 수학과 기하학의 방법을 가져와 ‘오감도의 세계’ ‘회색의 세계’를 그려냈다. 하나의 인식체계에서 새로운 인식체계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사회적 격변에 대한 문학적 반영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처음 이상 문학을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지적 놀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이상의 작품을 읽을 때, 이상이 가장 존경했던 시인 김기림이 말한 것처럼, 이상은 펜이 아니라 피로 작품을 썼다고 느낀다. 나는 그가 매순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너무나 절실했고, 문학으로 이에 맞섰으며, 자기고의 근원을 인간고의 근원으로까지 확장시킬 줄 알았던 작가라고 믿는다.
 
 [참고문헌]
 김윤식·이승훈 엮음, 이상문학전집1~4, 문학사상사, 1989-1995.
 김윤식, 고교생과 함께하는 김윤식 교수의 시 특강, 한국문학사, 1997.
 김윤식,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문학사상사, 2005.
 이상 문학 연구 60년(권영민 편저), 문학사상사, 1998
 정은경, 이상(약전으로 읽는 문학사1), 소명출판, 2008
 글=문수현
 그림=강현화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이 연재물은]
 전북교육신문에 동시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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