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배울 것인지 고민해야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겨울 교육관련 뉴스 중 상당 수는 입시전문가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융복합, 4차산업혁명 이라는 말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입시전문가들은 새로운 미래가 필요한 영역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부단히 이야기하고, 대학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미래형 인재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개 이것은 불필요한 표면이며, 대부분의 학생, 학부모, 입시전문가들은 학벌서열과 의치약학계열 중심으로 이 시장의 핵심이 굴러감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대는 불안과 등치이다. 기대와 불안은 본래 동시에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모두 미래학자인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떠드는 까닭은 불안을 부추기기 위해서다. 아니 거의 ‘불안해라!’ 명령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이 명령에 따라 조금이라도 의지할 사람들을(대개 이 명령의 주체에 해당하는 사람들)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융복합과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은 불안을 자극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 지금 한국에서 교육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불안을 통해 시장을 형성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을 견디기 어려워할 수록 미래에 도태되지 않을 혹은 늦게 도태될 것을 찾는다.
 
▲불안 커질수록 권위에 호소하는 힘 세져

 불안이 커질수록 권위에 호소하는 힘이 세지며, 불안을 먹고 자라 커진 권위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직 변화하지 않는 기득권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세계는 더욱 견고해지며 불안한 모든 이들의 숭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변화에 대한 사회적 추동력을 약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 때문에 혹은 불안을 부추기며 하는 모든 교육은 세계를 고착화시키는데 이바지한다. 변화에 대한 호들갑이 현재에 대한 고착화를 심화시킨다.

 만약 진정으로 미래에 대해 진지한 진단을 할 수 있는 입시 전문가들이 활동하려면 우리 사회 지성의 공론장은 활발해야 하고, 각 분야의 전문 서적들은 적어도 지금처럼 안팔리지는 않아야 한다. 사회의 변화는 자동적이지 않고, 끊임없는 방향성 모색이 담보될 때 일어난다. 기술의 혁신만이 새로운 사회를 자동적으로 만들지 않으며, 사회의 합의가 기술의 혁신에도 결국은 관여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론장을 통한 논의는 부족한 채로 모든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생성된다. 그리고 그들이 미래를 아는 척 한다.

 기본적으로 이런 현상은 교육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들이면서 심화된 것이다. 교육이 분야별로 파편화되고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교육의 소비자들은 자신이 구매하는 상품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그 상품을 통해 무엇이 될 것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유형의 상품이 아니다. 왜냐면 교육은 그 내용과 무관하게 그 물건의 사용법만을 익혀 사용가능한 것이 아니라 재생산이 가능한 위치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아주 복잡한 노트북의 생산 매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않아도 수요자들은 노트북을 몇가지 사용법을 익혀 구매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다. 내가 구매하려는 상품이 형성된 배경에 무관심한 것이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지도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 또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떤 맥락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이룩해왔는지 교육의 소비자들은 알아야 하며, 이 알아가는 과정이 곧 활용법과 분리될 수 없다.
 
▲남의 공부 알아주는 노력이 곧 연구

 하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대학의 내부에 어떤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지는 별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누가 나를 가르치게 될 것이며, 나의 자녀를 가르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 없이 대학을 열심히 선택한다. 이 무시무시한 맹목이 교육시장의 형식적 보수화를 유지시킨다.

 교육이 가진 진정한 보수성은 교육의 생산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단 닮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권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권위를 기꺼이 박차고 새로운 권위를 형성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산자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끊임 없이 결과가 아니라 경로를 물으며, 이 경로는 대학의 이름 따위로 답해질 수 없다. 오히려 이 경로에 대한 무관심이 마치 대학의 이름을 경로의 전체인 것처럼 포장한다. 우리는 어떤 자격 어떤 직업 이전에 내가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필요하고, 이 관심은 곧 활발한 학문적 관심에 다름 아니다. 대학에 대해서가 아니라 대학과 대학 바깥에 어떤 자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까닭이다. 남의 공부를 알아주려는 노력이 곧 연구이며, 이 연구를 바탕으로 좋은 만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만남이 가져다 주는 변화가 곧 성장이다.
강경필(광주교육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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