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현재의 대성약국 자리에 중앙여객이 있을 때만 해도 금남로5가는 외지 손님들로 북적였다.
인근 대인동에 구터미널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천동 터미널시대가 열리면서 금남로5가는 금융가가 위치한 1·2가와 달리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금남로 5가에서 30여 년의 시간을 견딘 익수당 한약방은 버스터미널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그 인근에는 40개가 넘는 한약방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많은 한약방이 경쟁을 했지만 시골 손님들이 많아 장사가 아주 잘 됐다. 특히 시골 한약방들에서 올라와 도매로 가져가는 약재는 상당한 매출을 올리게 했다.
주인 이태원(59)씨는 “그때는 이 거리로 사람들이 엄청 많이 다녔지. 자가용이란 게 전혀 없던 시절이니까 전부 버스 타고 다닐 때잖아. 아무래도 약 짓는 사람이 꽤나 많았지. 시골에서 자식들 보러 올라 왔다가 보약 한 재씩 지어 먹이고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인근의 한약방들이 차츰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다. 수많은 한의원들이 생겨났고, 약국에서도 한약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경쟁업체가 등장하면서 현재 이곳에는 10여 개 정도의 한약방들이 남아 장사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한의원이 거의 없었잖아. 한약 지으려면 전부 한약방으로 왔었는디 지금은 어디 그래. 웬만한 거리에 전부 한의원이 하나씩은 생겼지. 인제 한약방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봐야제.”
변한 것은 한약방의 영향력만이 아니다. 한약방에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약장 정도일 뿐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새롭게 들어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약방에서 직접 약을 달여 파는 일은 없었다. 한 재 20첩을 종이에 싸서 약만 지어 주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약 달이는 기계가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약을 달여주는 것은 물론 비닐팩 포장까지 해준다.
한약방의 상징인 입구의 약재 전시장도 많은 변화를 이뤘다. 거북이나 고라니, 너구리 등을 박제해 놓던 시절은 아주 옛 이야기에 속하고 지금은 몇몇 약재나 술, 인삼 정도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익수당 한약방에는 30여 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옛 물건들이 상당히 남아있는 편이다. 손으로 들고 약재의 무게를 재던 옛날 저울에서부터 약재를 다져내는 쇠절구통까지 처음 한약방문을 열었을 때 썼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처음부터 쓰던 물건이라 쉽게 버릴 수는 없제. 글고 절구통은 아직도 가끔씩 사용하기도 하지. 실상 저 물건들에 쌓인 세월로 한약방이 이만큼 버텨온 거 아니것어. 인제는 단골 없으면 한약방 장사 못해. 우리집은 오래 되야서 이민 간 사람도 한국 다니러 오는 길에 와서 보약을 지어 가. 단골 아니면 진작 문 닫았을지도 모르제.”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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