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승일
자음과 모음, 문자, 먼지, 비눗방울…

▲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남동성당 맞은 편 건물이에요. ○○ 인쇄 안보이세요?”

 “안 보이는데요. 저는 지금 맞은 편 ○○ 병원 앞에 있는데요.”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어긋남이다. ‘맞은편’의 개념이 서로 달랐다. 기자가 좀더 상식적이었다. 작가는 좀더 주관적이었다. 기자가 고생 좀 했다. 과장 좀 섞어 땀을 주르륵 흘렸다. 우여곡절(?) 끝에 가진 만남. 만나자 마자 대뜸 “여긴 맞은 편이 아니고 옆 골목인데…그렇게 말씀해주시지…”라며 원망의 말을 던졌다. 작가는 머리를 긁적였다. 언어란 때론 ‘어긋남’을 가져온다.

 

 자음과 모음 해체된 문자 그리는 남자

 “제가 말을 잘 못해서…” 긁적 긁적.

 20대 후반의 젊은 작가 이승일. 언어들이 그의 입을 거쳐 나오기 전에 머뭇거린다. 과연 나가도 될까? 저 불투명한 장애물들이 많은 밖으로 나가서 제대로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나오는 언어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문자에 끌린다. 그가 그린 그림들에는 문자들이 흘러다닌다.

 “언어란 것이 생명력이 있는 것 같아요. 말한대로 이뤄진달까? 문자를 작품 속에 풀어봐야 겠다 생각했어요. 본격적으로는 2년 전부터 문자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어요.”

 감사의 말, 존경의 말,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문자들이 모음과 자음이 해체된 채 그림 안으로 녹아들었다. 글자의 조각을 모아 맞춰보면 마치 암호처럼 문장들이 떠오를 것이다. 혹은 그림 속 문자들의 강에서 보는 사람이 원하는 문장들을 건져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라. 그림 속에서 말들이 튀어나온다. 웃으라고? 만나서 반갑다고?

 지난해 가진 첫 개인전은 문자들이 있는 그림으로 채웠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가 시리즈의 제목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다.











 

 

 먼지 낀 창문 두드리는 빗물 찍는 남자

 판화를 전공했지만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진도 찍는다. 지난 2006년에 졸업했으니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건 이제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대학때 사진 수업을 들었어요. 사진을 찍고 보니 회화랑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그 때 사진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답게(?) ‘먼지’를 찍었다.

 “사소한 것, 더러운 것, 필요없는 것, 닦아버리는 것이 먼지 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더라구요. 먼지 알갱이가 조형적으로 다가왔어요.”

 가만히 보는 것. 삶의 이면에서 아름다움을 건져올리는 데는 ‘가만히’가 필요하다. 가만 보니 그는 ‘가만히’ 무엇을 보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대학 조교로 일했던 때,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어느 날, 가만히 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먼지 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먼지 낀 창문을 두드리고 다시 햇볕이 먼지 낀 창문에 내려 앉고 그리고 다시 빗물이 두드리기를 반복했을 창문. 거기서 그는 멋진 그림을 본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창문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는 먼지 찍기 시리즈에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제목을 붙였다. 누군가에겐 닦아버려야 할 귀찮은 먼지들이 작가에겐 빛나는 별이었다.

 다음에 찍은 것은 비눗방울. 그는 작업실 앞에서 혼자 비눗 방울을 불어 허공에 띄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매일 그랬다. 불고 또 불고 찍고 또 찍고. 지난 봄부터 그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듯 쳐다봤다. 다 큰 어른이 비눗방울 놀이를 한다고 혀를 끌끌 찾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그의 곁에는 지나가는 아이들이 머물렀다.

 “비눗방울이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 어른들은 관심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눗방울 안에 세상이 들어있어요. 3~4초 동안 머물다 금방 터져버리지만요.”

 정말 들여다 보니 세상이 거기 들었다. 노을 진 하늘도 들어 있고 건물도 들어 있고 작가도 들어 있다.

 남들에겐 ‘한가한 놈’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그는 3~4초 후면 사라질 비눗방울과 사투 중이었다. 한 손으로 비눗 방울을 불고 한 손으로 셔터를 눌렀다. 바람이 불면 사진 찍기 더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진을 보고 합성이냐고 물어봐요. 그런데 손을 하나도 안 댔거든요. 보정 자체를 안 한거예요.”

 포토샵 같은 것으로 색감을 조정하지 않았다. 감을 익히려고 셔터 스피드며 감도를 단계별로 일일히 조정해가면서 찍었다. 비눗방울 시리즈에 붙인 제목은 ‘잠시 머물다’. 비눗 방울은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갔지만 그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작은 세계를 담았다. 그리고 그 비눗방울 시리즈는 지금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홍보관에서 전시 중이다. 두번째 개인전인 셈이다. 26일까지가 전시 기간이니 그 안에 잠시 들려봐도 좋겠다. 작가가 건져올린 세상이 거기 있다.











 ▲ `별이 빛나는 밤에’

 

 ‘예술’아니면 안되는 남자

 남들처럼 졸업 후 기로에 섰다. 작가로 살 것인가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힘들 거라는 걸 알았죠. 그런데 떨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생각을 했죠. 결론 내린 건 ‘행복하기 위해서 이 길을 간다’예요. 내 자신이 행복해야 남한테도 행복을 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작가의 길을 간다.

 “어렸을 때는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는 공모제에도 출품하고 그랬어요. 소위 ‘스펙’이라는 걸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그 때부터 공모제를 멀리 했어요. 상금 때문에 출품은 안해요. 프로젝트나 작가 지원 프로그램은 제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길. 그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피해갈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이 돼 김영태 사진작가의 작업실 한 켠을 작업실로 쓰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사진 촬영을 돕는다.

 “작품 팔아서 생활하기도 어렵다”고는 하지만 최근 평생 처음으로 작품이라는 걸 팔아보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아트 페어 블루닷아시아에 매개공간 미나리와 함께 작품을 출품했다. 거기서 그의 작품이 몇 점 팔렸다.

 “가서 자극 좀 받고 오자는 생각으로 그냥 참가했어요. 그런데 작품이 팔렸다고 하니까 정말 신기해요. 서울에서 작품이 아직 안내려와서 어떤 작품이 팔렸는지 아직 몰라요.”

 

 나름 재미있게 사는 남자

 “남들은 저한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요. 삶의 낙이 뭐냐고….”

 일반적인 예술가들이 ‘술’과 친한데 반해 그는 술을 하지 않는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당구도 치지 않는다. ‘술+담배+당구’의 심심풀이 3종 세트를 모두 하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이 묻곤 한단다. 그냥 그림만 그리고 사진만 찍으니 그럴만도.

 “아마도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것들을 하지 않아서 묻는 거겠죠. 그런데 그런 걸 해야만 즐거움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의 즐거움은 따로 있다. 차 한 잔 그리고 산책.

 아침 8시30분에서 9시 사이 작업실 도착. 촬영 일정 체크. 이후 촬영 스케줄 있으면 촬영을 하고 아니면 개인 작업 진행. 오후 6시30분 이후는 자유시간. 이 시간 작업실을 나선 작가는 작업실 근처 조그만 카페에서 매일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너무 작아서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친밀해지는 카페.

 “빼놓지 않고 매일 가요.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요. 엊그제도 카페에서 알게된 분이 제 전시회를 찾아 오셨어요.”

 말을 잘 못한다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그다. 하기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말 뿐은 아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두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또 다시 ‘가만히’의 세계로 들어선다. 산책길이다. 집까지 걷고 집 근처 대학교 교정을 걷는다. 그러다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거나 잊혀져 있거나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것들을 건져 내기도 했겠다.  











 ▲`잠시 머물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봄 햇살이 좋다. 기분이 좋다. 2009. 4. 13.>

 2009년 4월13일. 봄 햇살이 좋았나 보다. 작가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았다. 그가 건내준 조그만 종이에 ‘봄’이라는 글자가 살랑거린다. 이렇게 짧은 글자와 그림을 담은 종이가 한무더기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그가 직접 만들었다. 자음+모음의 기계적 결합을 용납하지 않고 거기다 사람의 온기를 더했다. “말을 잘 못해서 답답하다”고 했던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접속을 한다. 그림도 사진도 커피도 산책도 모두 그의 접속 방식이다.

 한 무더기의 폴라로이드 사진들도 있다. 날짜가 적혀진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는 그가 산책을 하면서 혹은 일상에서 건져낸 ‘작고 소소한’ 풍경들이 모두 담겼다. 촘촘한 감성의 결로 걸러낸 세상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가 건져올린 소소한 것들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낸다.

 “사진이나 그림이나 자기만 보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다. 의미가 없다.

 “구석지고 후미진 곳에 있는 것들이 나를 통해서 예술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의 작품들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홍보관 3층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그의 다음 작품의 제목은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이다. 모든 꽃은 흔들리며 피는 법이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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