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철 엮음, 초등학생 63명 시, ‘요놈의 감홍시’, 보리, 2005.
고드름이 달리는 한겨울이 되면 나는 이 시가 떠오른다. 경북 울진 온정초등학교 3학년 김은정이 쓴 시 ‘고드름’이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아빠 바지 끝의
아기 고드름
쪼르르 타고 내려와
떨어질까 봐
두 손 꼭 쥐고
매달려 있지요.(1985. 12)

이호철 선생이 엮은 어린이시집 ‘요놈의 감홍시’(보리, 2005)에 실려 있는 시다. 어린이가 쓴 시를 ‘동시’라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시는 김은정 어린이가 쓴 ‘어린이시’다. 동시는 ‘어른’이 써서 아이에게 주는 시를 말하고, 흔히 ‘어린이를 위한 시’라 한다.

세계 어린이문학에서 ‘동시’ 장르가 있는 나라는 일본과 중국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동시를 전문으로 쓰는 ‘동시인’이 그렇게 많지 않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동시를 쓰는 시인이 시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 장르가 애매한 것은 분명하다. 어린이도 알아서 은정이처럼 자신의 삶을 시로 쓰고, 또 쓸 수 있는데, 굳이 어른이 시를 써서 아이에게 줄 까닭이 없다. 또 어른이 쓴 동시를 보면 대개 유치하다. 어른이 ‘어린이 마음’이 되어 쓴 시를 읽다 보면 도무지 읽을 맛이 안 난다.

어른이 어린이가 아닌데 어떻게 어린이 마음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도 안 맞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도 근대 초기에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데니스 리, 존 컨리프 같은 동시 작가가 몇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어른이 쓴 시 가운데서 시인이나 편집자가 아이들도 읽을 만한 시를 골라 엮어 아이들에게 준다. 이것을 선집(selection)이라 하고, 거기에 묶은 시를 ‘poetry for children’이라 한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도 이 분류대로 검색을 해 보면 수많은 책이 뜨는데, 거의 다 전래동요나 시 선집(selection)이다. 이렇게 봤을 때, ‘지금’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poetry for children’은 우리처럼 어른이 처음부터 아이에게 주려고 쓴 시가 아니라 어른들이 쓴 시 가운데서 아이들에게 ‘적합한’, 대체로 쉬워 아이들이 ‘읽을 만한’,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시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전치사 ‘for’를 (어린이를) ‘위한’으로 옮기지 않았다. 화가 김환영도 어느 글에서 동시 장르를 놓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누구에게 바칠 수야 있겠으되, 아이고 세상에나, ‘∼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 장르가 있던가!”

맞는 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 장르’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시의 정의 ‘어린이를 위한 시’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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