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푸른빛과 파란빛을 구별하지 않는 것일까

▲ 2015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연 기획전시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안내장 부분. 청화백자의 무늬 그림을 과연 ‘푸른빛’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인은 대개 ‘푸른’과 ‘파란’을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푸른 하늘’ ‘파란 하늘’, ‘푸른 신호등’ ‘파란 신호등’, ‘푸른 바다’ ‘파란 바다’, ‘푸른 들판’ ‘파란 들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적절한지 물으면 거의 다 비슷하게 절반씩 나온다.

 세상을 맑고 날카롭게 본다는 시인들의 시에도 하늘을 푸르다고 표현한 대목이 수없이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윤용이, 강우방, 유홍준 같은 미술사학자들도 ‘푸른’과 ‘파란’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맑고 파란 하늘빛’ 고려청자는 ‘푸른 청자’가 되고 만다.

 영어는 ‘푸른’과 ‘파란’을 ‘그린(green)’과 ‘블루(blue)’로 분명하게 구별한다. 두 빛깔의 ‘개체성(individuality)’이 분명한 것이다. 한국인이 그린과 블루를 잘 구별하지 않는 것은 두 빛깔의 본질을 ‘같은 것(one-ness)’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은 이 세상 빛깔을 다섯 가지 빛깔 오방색으로 보았다. 그것만 가지고서도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오방색 가운데 하나인 청은 ‘푸를 청(靑)’이다. 뜻은 그린(푸른)이고 음은 블루(청)다. 여기에서 혼돈이 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두 빛깔의 본질을 같게 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저 멀리 장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장자는 눈이 밝은 이주와 귀가 밝은 사광을 비판한다.

 “지나치게 눈이 밝은 자는 오색의 올바른 빛을 어지럽히고 화려한 무늬에 혹하게 된다. 거기서 생겨난 청황색이나 보불의 무늬처럼 눈부신 휘황함은 좋지 않은 것이다. 이주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또 지나치게 귀가 밝은 자는 오성의 올바른 음향을 어지럽히고 갖가지 가락에 사로잡힌다. 거기서 생겨난 종과 경, 현과 죽 따위 악기와 황종 대려 같은 선율도 좋지 않은 것이다. 사광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장자, 〈외편〉 ‘변무’)

 여기서 장자는 빛깔 ‘청황색’과 선율 ‘황종’도 오방색과 오성에서 온(‘생겨난’) 것이고, 빛깔과 소리를 너무 잘게 나누는 것(개체성)보다는 그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빛깔과 소리 문제는 산업과 음악의 발전을 위해서도 낱낱의 개체성을 인정하고 구별할 필요가 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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