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여인의 삶이 주는 잔잔한 감동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는 감독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신작 촬영을 앞둔 술자리에서 예술영화감독인 지 감독(서상원)이 급사(急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 감독 영화의 프로듀서인 찬실(강말금)은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일을 하며 마흔의 나이가 된 찬실로서는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찬실은 어떻게 될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직장을 실직한 마흔 살 여인의 이야기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굴곡진 드라마가 아니다. 그저 찬실이 실직 이후 누구를 만나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찬실은 산동네로 이사를 가 주인집 할머니(윤여정)를 알게 되고, 배우인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로 일 한다. 그리고 소피의 불어 선생님인 김영(배유람)을 만나 연애감정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마흔 살 찬실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그간 한국영화는 직장도 없이 혼자 사는 사십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적이 없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영화의 도전은 용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도전이 무모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인 찬실이 입체적이고 개성이 있는 인물로 부각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찬실은 부산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실직 후 많이 힘들지만 그 힘듦을 건강한 생명력으로 돌파한다.

 그렇다고 찬실의 마음 저 밑바닥에 있는 외로움이 숨겨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찬실은 남은 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를 정하지도 못했다. 바로 이 순간, 장국영(김영민)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찬실의 눈에만 보이게 되고 이내 두 사람은 대화 상대가 된다.

 귀신 장국영은 찬실과 함께 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캐릭터다. ‘아비정전’(1990)에서 아비(장국영)가 ‘Maria Elena’(마리아 엘레나)에 맞춰 맘보춤을 출 때 입었던 흰 메리야스와 사각 팬티 복장으로 등장한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이 캐릭터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에 윤활유 역할을 하며 극을 이끈다. 그리고 장국영은 찬실에게 결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결국 찬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삶과 죽음을 사유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다들 열심히 살아간다. 주인집 할머니는 말로는 빨리 죽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성껏 콩나물을 다듬고 한글을 공부하며 달을 보고 소원을 빈다. 배우인 소피 역시 시나리오 읽으랴 불어 배우랴 찬실을 방문하랴 열심히 뛰어다닌다. 그리고 김영 역시 시나리오를 쓰고 불어를 가르치며 단편영화 워크숍 강사로 나서는 등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찬실은 이들을 보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의 첫 장면이 감독의 급사로 시작했던 것은 그 전조다. 여기에다 주인집 할머니는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딸의 방을 치우지 않음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곳에 자주 출몰하는 귀신인 장국영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찬실이 언급하는 ‘동경이야기’(1954) 속의 일찍 죽은 엄마와 전쟁에서 잃은 아들의 이야기 역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또한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진행자인 정은임의 목소리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의 것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죽음의 무드로 가득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 속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인물들에게 미세하게 다가가거나 배회하며, 마치 사자(死者)의 혼이 인물들의 곁에 있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마흔 살의 실직자인 찬실을 응원하는 척 하면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를 사유하도록 하는 영화다.
조대영<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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