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는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렸다하여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다. 산두(山斗)는 태산(泰山)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말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최산두는 6세 때 글을 배우고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돌아오던 중에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학문을 익혔다.

 최산두는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로 함경도 회천으로 유배되어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를 왔던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며 학문을 닦았다. 사숙은 존경하는 사람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31세에 생원시에 문과에 급제하자 중종이 ‘임금에게 선이 있으면 보명이 새로워져 사직이 영원하리라’는 뜻으로 일인유경보명유신(一人有慶寶命維新)이라고 쓰인 옥홀을 내렸다. 옥홀은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을 착용할 경우 손에 잡았던 의식 용구를 말한다.

기묘사화로 화순서 15년 유배 살아

 종6품 보은현감, 정6품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최산두는 정4품 의정부 사인으로 재중 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전라도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기묘사화는 중종 때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화로 조광조가 화순으로 유배되어 처형되자 양팽손이 시신을 수습했다. 최산두는 유배지 동복에서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 후진들을 양성했다.

 유배생활 중에 수백 척 단애절벽을 오가며 중국의 적벽(赤壁)에 버금간다하여 화순적벽이라 명명했다. 을사사화로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던 송정순이 적벽에 정자를 짓고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정(勿染亭)이라고 하였다. 적벽에서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이 방랑 생활을 마치고 이승을 떠났다.

윤구, 유성춘과 호남삼걸로 칭송

 최산두는 15년 만에 해배된 뒤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동복에서 살다가 3년 후에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최산두는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柳成春), 윤구(尹衢)와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유성춘은 평생을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 유계춘의 아들이자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柳希春)의 친형이다.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되었고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윤구는 녹색 비가 내린다는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의 터를 잡은 윤효정의 아들이며 20년 동안 유배를 살았던 윤선도의 증조부이다.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해남에서 18년 동안 유배살이를 끝내고 벼슬을 거부했다.

 또한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金麟厚), 퇴계와 12년 동안 편지로 논쟁한 기대승(奇大升),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이항(李恒), 호남3걸인 유성춘의 동생 유희춘(柳希春),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박광전(朴光前) 등을 함께 ‘호남오현(湖南五賢)’이라고 한다. 호남삼걸과 호남오현을 배출한 호남은 예향, 미향, 의향의 고장이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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