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은 중종(中宗) 22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의 조카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김인후, 이항 등과 교우했고 고경명, 최경회 등을 양성했다.

 기대승은 사마시에 이어 알성시에 합격했으나 윤원형(尹元衡)은 기준의 조카라는 이유로 기대승을 낙방시켰다.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청요직의 하나인 승정원 주서에 임명됐다.

 명종 정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외삼촌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이 되었으나 기대항의 상소로 종6품 홍문관 부수찬으로 복귀했다. 중종 계비인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간신 윤원형과 더불어, 명종의 정비인 인순왕후의 인척으로 임금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를 농단하던 이량과 심통원을 3흉(三凶)이라고 하였다.

 정3품 홍문관 부제학으로 재임하던 기대항(奇大恒)은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권신 이량이 기대승·허엽·이산해 등을 제거하려 하자 이량 일파를 탄핵하여 유배를 보내는 데 앞장섰다. 기대항은 기묘사화로 처형된 기준의 아들이며 기대승의 종형으로 종2품 대사헌에 이어 정2품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기대승은 32세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34세인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을 두고 사칠논쟁(四七論爭)을 하였다.

 이황은 이(理)와 기(氣)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이(理)와 기(氣)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했다.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희, 노, 애, 구, 애, 오, 욕(喜怒哀懼愛惡欲) 등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말한다.

 기대승은 정몽주, 김숙자, 김종직, 조광조, 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왕이 스스로 힘이 아닌 어진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기대승은 선조가 즉위하자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언로는 국가의 대사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며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대승은 유학의 진흥과 문묘를 관리하는 대사성에 임명됐고 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대사간을 역임했다. 정3품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전라도 고부에서 사망했다

 월봉서원(月峰書院)은 기대승 사후에 호남 유생들이 고마산 자락에 망천사를 세워 위폐를 모셨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너브실 마을로 다시 옮겼다. 청백리 박상과 15년간 영의정에 재직한 박순, 동방 18현인 김장생, 김집 부자가 모셔졌다.

 월봉서원은 17대 임금 효종이 ‘월봉(月峰)’이라고 사액했고, 21대 임금 정조가 기대승의 고귀한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 같다고 하여 ‘빙월당(氷月堂)’이라고 이름을 지어 내렸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다시 복원했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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