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다다오와 빨간 호박의 나오시마에서

▲ 나오시마의 호박.
 글로벌 시대라고 하지만 촌놈인 나에게 외국을 가는 것은 늘상 두려운 일이다. 그들의 하늘과 세상은 궁금한데 내 입은 그들과 맞지 않아서다. 그런 탓에 여행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국내 여행으로만 내 행동 반경을 제한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 국내 손님이 국외 여행의 손님으로 변화되며 동반하길 원하면 꼼짝없이 함께 해야 했다. 그때는 햇반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내 여행 가방에는 고추장과 봉지김치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끔 여행사에 근무하던 때를 회고해 보면 에피소드도 많았다. 지금이야 누구고 마음먹으면 떠날 수 있고, 쉽게 비행기도 탈 수 있지만 예전에는 쉽지 않았다. 광주에서 제주 가는 비행기는 더욱 힘들었다. 강원도 분들이 버스를 타고 전라도 여행을 하고 1박을 한 후 광주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타도 서울 제주 왕복 비행기 요금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그러니 광주비행장은 늘상 만원이었다. 그런 항공권을 단체로 구하는 일은 더욱 힘들어서 사람들은 여행사에 서너 달 전부터 표를 부탁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해 봄날 졸업여행을 떠나는 대학생들을 인솔하는데 비행기로 오르는 트랙에서 나는 신발을 벗고 카펫에 올라 천연덕스럽게 좌석에 앉았다. 인솔자인 나를 따르던 30여 명의 학생들 모두가 한결같이 신발을 벗고 내 뒤를 따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절은 그 뒤 곧장 달라졌다. 1989년 국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뤄졌다. 그전까지 만 30세 미만의 남성은 해외여행은 사실상 금지된 시절이었다. 그 조치 이후 해외여행의 수요는 봇물 터지듯 급증해 갔다. 이후 그런 장난은 통하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후 여행업은 활황이었다.

▲20대 중반 여행사 열었다 백기 들다

 나는 몇 년을 더 근무하다 내가 기획한 상품을 직접 판매할 요량으로 20대 중반 여행사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깨끗하게 백기를 들었다. 생태관광이나 답사여행 같은 상품은 시장에서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성급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못 다한 공부에 열을 올리며 그렇게 지금의 이 순간까지 왔다.

 두어 달 전 대인시장 별장팀들이 호박과 안도다다오의 건축으로 유명해진 섬, 나오시마를 가겠다고 해서 일정을 보니 한국관광공사의 일과 겹쳐 나를 제외해 달라고 했다. 30만 원 미만의 2박3일 상품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쇼핑도 가이드의 수고료도 옵션 관광·유류할증료도 없는 상품이었다. 가고 싶었지만 별수 없는 일이기에 남의 일처럼 무감하게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연기되었다. 다시 간다고 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말을 꺼냈더니 10여만 원을 더 지불하면 함께할 수 있다고 한다. 대열에 합류했다.

야시장을 마치고 비가 내리는 유스퀘어를 9명의 전라도 친구들이 떠나간다. 2박3일 다카마츠로 가는 일정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나오시마였다. 나머지는 모두 별책 부록 같았다.

이른 새벽 도착한 인천공항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패키지를 책임질 여행사 직원을 만났다. 출국수속이나 탑승수속은 각자의 몫이었다. 예전 여행사 시절 세관신고까지 다 사무실에서 적어가던 그런 풍경은 없었다. 출국이 떨리거나 두려웠던 세상은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동해를 따라 남하한다. 일행 중 한명은 구름 사이로 행여 독도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졌지만 창문만 보면 핸드폰을 꺼내야 직성이 풀리는 현 세대와는 참으로 다른 모습을 간만에 만났다.

▲충효동에서 봤을법한 왕버들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일본의 입국수속은 지문을 받아내는 것에서 섭섭함이 있었다. 패키지에 편입된 이 모두들 나와 모이니 30여 명이 된다. 버스를 타고 본격적인 투어에 나선다. 고토히라 신사가 첫 번째 방문지다. 우리가 사찰의 왕국이었듯이 일본은 신사의 나라다. 어떤 영물이건 신사에 모시며 영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국가의 모습은 고토히라에서 만난다.

푹푹 찌는 더운 날씨이며 월요일인데도 많은 인파들이 지팡이를 의지해 신사에 오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우리 사찰의 풍경과 유사하면서 또 다른 그 내부를 살피 보니 비석이 즐비하다. 저마다 신사에 자신의 염원을 기원하며 헌금을 한 내력과 소망이 적혀 있다. 세속적이며, 기복적인 성격이 우리나라 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면이 도드라진다.

신사의 중심 건물 곁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잠수함, 크루즈선, 어선 등 온갖 바다와 관련한 사업의 이야기를 담아 기원하는 처소가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면에는 충효동에서 보았던 왕버들나무가 있다.

우리의 당산나무와 격을 함께하는지 금줄이 쳐져 있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아도 문화적 동질성과 민족적 특성이 비교가 되는 상황을 맞았다. 물론 신사의 장식적 요소에 부여된 동물형상, 석등의 모습 등이 다른 듯 같은 요소에서도 불교의 이입과 그 사이에 일본적 신앙으로 습합한 형태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내려와 나카노 우동학교에 갔다. 각 지역 고유의 우동에 대한 자부심과 비법이 있다는 일본에서 우리 패키지는 체험학교를 경험하게 하고, 직접 점심을 해결하게 하며, 스스로 맛을 만들었기 때문에 불만족 요인을 말끔히 제거하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동으로 해결한 점심 후 일본의 경승으로 지정된 리츠린 공원에 갔다. 약 370년의 역사를 가진 공원은 1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시운산이 큰 배경이 되고, 6개의 연못과 13개의 구릉이 이어져 있었다.

수공간의 활용과 수목자원의 인공적 조림이 도드라졌다. 역시 축소지향의 일본이 맞구나 싶으면서 우리네 소쇄원이 그렇듯이 자연을 파고든 것이 아닌 자연에 앉힌 구조와는 다름이 여실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보는 일본의 정원은 아름다움의 이면에 수목들의 억제된 성장력과 관리인들의 땀방울이 동시에 보이는 안타까움이 비교되었다.

▲독지가와 건축가 힘 합쳐 역사 이룩

 첫날의 여행을 마치고 9명은 터질 듯한 방에 모여 하루사이의 감흥을 이야기하고, 다음날을 준비했다. 나오시마, 더듬어 보면 전남대학교의 강신겸 교수가 이 섬의 이야기를 해 주신 기억이 있다. 버려진 섬을 독지가와 건축가가 힘을 합쳐, 가고 싶은 섬으로, 매력 넘치는 섬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야말로 예술의 힘이 한 섬의 척박함을 생명력 가득한 곳으로 바꾸었던 것임을 이야기했다.

그 후 광주에서도 한 팀을 꾸려 이 섬에 다녀오신 분들이 있었다. 미술인, 건축가, 도시계획전문가, 문화기획자, 언론인 등이 다녀오신 기억이 난다. 드디어 그곳에 나도 섰다. 목포에서 안좌도 가는 거리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배는 너무나 쾌적해서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간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곳과 저곳의 다름을 전이해 주는 매개로서 여객선은 정확하게 일본이 섬나라임을 인식하게 해 줄 정도였다. 섬에 내려서 우리는 가이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섬을 돌기로 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섬의 중심부에서 펼쳐지는 예술의 집 프로젝트를 탐방하는 것이었다. 이 섬도 감소하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빈집이 많은 곳인데 이를 활용해 아티스트들의 영감이 그 집의 터무니와 결합한 작품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안도 다다오의 새로 지은 건물을 만났다. 이곳의 지형과 어울리는 커다란 집은 안도다다오의 빛과 물을 활용한 예지력과 빛나는 투혼이 반영되고 있었다. 다다오와 짝을 이루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도 관람했다. 물경 한 시간을 기다려 관람한 작품은 솔직히 내 눈에는 실망스러웠다.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 만났던 그 작품과 너무나 흡사해서 이미 봐버린 영화를 또 보는 느낌이 있었다.

▲공간을 새롭게 해석해 역사 이루다

다시 길을 나왔다. 나오시마의 시간은 쏜살같아서 자칫 지중 미술관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함이 든 것이다. 제임스 터렐과 안도 다다오의 정성이 깃든 그곳에서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역사를 써 나간 이들의 창조력과 영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백업해주는 정책이나 재원이 그랬고, 이런 색다른 시도를 안아줄 수 있는 지역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가까이 제주의 우도, 그 천혜적 경관을 가지고 있어 수많은 방문객을 한꺼번에 수용하다 결국은 땅이 무너지겠다는 우려와 입도를 제한하는 경우가 떠올랐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집 프로젝트와 지중 미술관 두 개를 보는 것으로 마감되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와봐야지 하는 재방문의 욕구도 생겼다.

이우환 선생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과 안도 뮤지엄도 찾고 싶었고, 나오시마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었다. 불과 2500명이 사는 섬에 단지 관광객이 아니라 세상을 기획하는 이들이 찾아오고 묵어가며 창조적 영혼의 심지를 돋아 나가는 섬으로서 나오시마는 그 희소성과 선지자의 탁월성과 예술성과 공동체성 사이에서 늘 새로운 섬으로 변모할 것이 예감 되었다. 빨간 호박 하나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기 위해 땡볕아래 대기하는 나는 조금은 초라해지며 꼭 또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배에 오르고 일본을 빠져 나왔다. 일본행의 여운이 아직도 깊어진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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